태조 이성계의 기록을 보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겸손한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면 '국새를 보고, 두려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 '왕인데도 불구하고, 일어서서 조회를 받았다.' 등. 정말 이성계는 겸손했을까? 아니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연기를 했을까?
또 이성계가 즉위하게 된 사유를 알리는 표문을 보면 겸손이 넘쳐흐른다.
● 1392년 7월 즉위한 이튿날 이성계가 즉위하게 된 사유를 알리는 표문을 명에 보내 사실을 알림.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임시로 고려 국사를 맡은 자) 신(臣) 아무(이성계)는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 : 작은 나라,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난 뒤에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속이고, 왕위를 도둑질한 것이 15년이었습니다.
무진년(1388년) 봄에 이르러 명령되어 군대를 일으켜 장차 요동(遙東)을 침범하려고 하여, 신(臣)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스스로 생각해 본 건데, 소방이 상국(上國, 작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큰 나라)의 경계를 범할 수 없으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대의(大義)로써 깨우쳐 즉시 함께 군사를 돌이켰습니다.
우(禑)는 이에 스스로 그 죄를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사양했는데, 창(昌)도 또한 어리석고 유약하여 왕위에 있을 수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의 비(妃) 안씨(安氏)의 명령을 받들어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왕요(王瑤)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 대리)하게 하였습니다.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법도를 어기고 형벌과 정치를 문란시켜서, 참소하고 아첨한 무리를 친근히 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를 내쫓으니, 신하와 백성이 분개하여 원망했으나, 아뢰어 말할 데가 없었습니다.
공민왕 비 안씨는 그렇게 된 이유를 깊이 생각하여, 그를 명하여 사저(私邸)에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온 나라의 대소신료(大小臣嫽, 모든 신하)와 한량(閑良), 기로(耆老, 육십 세 이상의 노인), 군민(軍民) 등이 말하기를, '군국(軍國)의 사무는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신을 권지군국사(權知軍國事, 임시로 국사를 맡은 자)로 추대하였습니다.
신은 본디부터 재주와 덕행이 없으므로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의 사정에 몰려서 도망해 피하지도 못하므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몸 둘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황제 폐하께서는 건곤(乾坤)의 넓은 도량과 일월(日月)의 총명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음과 미신(微臣)이 마지못했던 일임을 살피시어, 성심(聖心)으로 재가(裁可)하여 백성들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이성계는 공민왕이 후사 없이 죽고, 신돈의 자식들이 연이어 즉위했는데, 그들은 어리석고 무능했으며 군대를 동원해 요동을 공격하려 했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장수들을 설득해 회군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글의 대부분의 느낌은 명에 바짝 엎드린 느낌이다. 새로운 이성계 왕조는 명에 순응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칭호도 신(臣), 아무, 권지군국사, 권지고려국사라며 스스로를 낮춰 홍무제(주원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표문이 먹혔는지, 홍무제는 역성혁명에 대해 별달리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견제하면서 "고려는 산과 바다를 격하여 동쪽에 치우쳐 있는 오랑캐이니 우리 명나라가 관여할 바 아니다"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잘 다독여 틈을 만들지 말라하였다.
1392년 8월 13일 ~ 8월 29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1392년 8월 13일
●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을 마전군(경기도 연천군 마산면 아미리)으로 옮김.
● 도당(고려 시대 최고 의정기관)에 한양 천도를 명함.
● 도평의사사(고려 후기의 최고정무기관)에 명령을 내려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함.
8월 20일
● 서자(첩의 자식) 이방석을 왕세자로 정함.
● 개국공신의 서열을 정하게 함.
● 사헌부(관리들을 감찰했던 관청)에서 고려 종친 등의 노비 수를 제한하도록 청함.
8월 22일
● 태조가 기탄(岐灘 : 대통여지도에 표기된 안양천의 다른 이름)에 머묾.
- 동지중추원사(관직) 조기(趙琦)에게 명하여 군관(각 군영과 지방 관아에 종사하던 낮은 벼슬) 2인을 뽑아 배 타고 건너는 일을 맡게 했다. 배타는데 있어서 난잡하게 하는 군사가 있다면 책임자를 처벌하게 함.
● 태조가 천신산에 머묾.
- 말이 논 2고랑을 손해 입힌 것을 태조가 보고, 말 주인에게 돈을 징수해 논 주인에게 주도록 조기(趙琦)에게 명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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