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태조 이성계

 

고려말은 썩을 대로 썩었고, 백성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빼앗기고, 짓밟혔다.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변화를 바랐고,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 정계의 내부에서도 2가지 세력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한 세력은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자고 했고, 한 세력은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성혁명을 도모하자고 했다. 역성혁명의 중심에는 정도전이 있었으나, 고려 말 급부상한 신흥무장 세력 이성계 장군이 있었다.

 

그와 뜻을 함께한 세력이 바로 신진 사대부들이었다. 

 

 


 

이성계 고려 중앙 무대로 진출

 

쌍성총관부 수복

 

이성계는 공민왕의 반원(反元) 정책 때문에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그는 고려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에 지배를 받고 있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이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원래 전주 지역의 향리였으나, 가솔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고조부 이안사, 아버지 이자춘 때까지 원나라로부터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쌍성총관부에서 세력가로 성장했다. 고려 중앙과 먼 거리에 있었던 쌍성총관부에서 고려 관리도 아닌 이성계가 중앙 무대로 진출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 덕이었다.

 

중국 원-교체기의 혼란한 국제 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공민왕은 많은 노력을 했다.

 

그중 쌍성총관부 지역을 수복하려고도 했다. 이때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였다. 이성계도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고려의 벼슬을 내렸다.

 

1361년 이자춘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이성계는 이때 20대 청년이었고,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를 겸비했었다.

 

특히 활을 매우 잘 쏘았고,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두었고, 그 세력이 훗날 권문세족이 두려워하던 '가별초'이다. 가별초는 변방의 세력이었지만 이성계의 리더십은 남달랐다.

 

이성계는 부하를 점잖게 대하고, 평생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장수의 부하들도 이성계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또한 사병도 각별히 아끼면서 극진히 대우를 했다고 한다.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가별초로 모이기도 했다고 한다. 

 

※쌍성총관부 : 원나라가 1258년 고려에 침입하여 청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

 

 


 

고려의 영웅, 이성계 장군

 

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이성계 황산대첩

 

이성계 장군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평안북도 강계 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며 시작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압록강이 얼어붙자 중국에서 10만 명의 홍건적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조직 2,000명(고려인 & 여진족)으로 수도 탈환에 참가해 홍건적의 두목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개경에 맨 처음 입성했다.

 

1362년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임을 물리쳤고, 1364년에는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가 침입했다.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무찔렀다.

 

또한 이성계 자신의 이종사촌 여진족 삼선과 삼개의 난을 평정하여 동북면의 안정도 되찾았다. 이렇게 그는 점점 탄탄함 입지를 확보하고, 고려 중앙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동시에 중요 벼슬도 거치게 되었다. 

 

당시 극심해진 왜구의 침입으로 이성계의 활동은 남쪽까지 이루어졌다. 왜구는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그 왜구들을 이성계는 황산에서 섬멸했고,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 한다.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20여 년 간을 고려를 위해 일했고,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했다. 그렇게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였고, 신진 사대부들도 그에게 다가왔다.

 

 


 

쿠데타, 위화도 회군

 

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변방지역 출신이라, 권문세족 출신들과는 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영과 같은 권문세족에게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쳤지만 이성계는 항상 최영의 다음이었다.

 

원나라가 북쪽 몽골 지역으로 쫓겨 가고, 중국 본토를 차지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명나라는 이웃 나라들과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고, 고려에게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관북지방, 함경도)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고 했다.

 

최영과 우왕은 이러한 요구에 반발했고, 아직 명나라는 불안하기에 이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고자 했다. 이성계는 최영에 의견에 반대했다. 하지만 완강한 최영과 우왕에 무시당했고, 결국 명을 받아 요동정벌에 나섰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했으나 큰 비를 만나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대로면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성계(우군도통사)는 조민수(좌군도통사)를 설득해 회군을 선택했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하고, 최영을 제거한다. 또한 우왕도 왕위에서 내쫓고, 고려 중앙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조선을 창업하다

 

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이성계의 쿠데타에 힘을 실어준 것은 신진 사대부들이었다. 당시 신진 사대부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 - 정몽주, 이색 /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

 

급진파 - 정도전 /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창업

 

처음에는 신진 사대부 전체(온건파&급진파)가 이성계와 협력하여 같이 나가갔지만, 새로운 왕조를 향한 급진파의 급격한 추진력에 의해 두 세력은 갈라졌다.

 

결국 역성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하고, 개혁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정몽주를 제거하고 4개월 뒤, 이성계는 추대를 받아 1392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고, 1393년 나라의 이름은'조선'으로 바꾸었다.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