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이성계 청색 곤룡포

 

7월 17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제헌절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헌절이 공휴일 폐지된 이후부터는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제헌절은 1948년 7월 12일에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헌법을 제정하여 조선왕조 건국일인 1392년 7월 17일에 맞추어 공포한 날이다. 조선왕조 건국일인 1392년 7월 17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공양왕 폐위

 

 

1392년 7월 17일 공양왕(고려 34대 왕)이 선위(禪位)하여 이성계가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국 35대 왕위에 올랐다.

 

왕조가 바뀌는 큰 변화가 백성들에게 혼란스럽지 않도록 국호는 고려로 유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이라는 국호는 1393년 2월 15일부터 사용했다.

 

공양왕이 선위를 하기 전 7월 12일에 이성계의 개인 저택에 찾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동맹(同盟)을 하려고 의장(儀仗)이 이미 길게 줄지어 섰는데, 종1품 시중(侍中) 배극렴 등이 왕대비에게 아뢰었다." 지금 공양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칭합니다."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결정했다.

 

 

 

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공양왕 폐위

 

남은, 정희계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렸다. 공양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유배되었다.

 

 


 

이성계와 국새

 

1392년 7월 13일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감록국사는 나라일을 감독하고, 인사권을 총괄한다는 뜻을 가진 임시 직책이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관직이었고, 이성계만을 위한 관직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이성계 저택

 

1392년 7월 16일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 등 많은 대소 신료와 한양에 있는 노인(60세 이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찾아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골목에 있었다. 모두가 기뻐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자고 했으나 대사헌 민개(閔開)만은 반대하였다. 남은이 민개를 죽이고자 했으나, 이성계가 말했다.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며 말렸다. 

 

이성계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집 안의 뜰으로 들어와 국새를 마루 위에 놓으니 이성계가 두려워하여 몸을 움직이질 못했다.

 

이천우(李天祐, 이성계의 조카)를 붙잡고, 겨우 침실의 문 밖으로 나오니 모든 신하들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성계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배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거절했다.

 

 

 

이미지 출처 - KBS대하드라마 정도전, 이성계 즉위

 

하지만 모든 신하들과 한양의 기노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하게 바랬다. 이성계는 마지못해 수창궁으로 갔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고려국 35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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