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황산벌 전투

 

고구려, 백제, 신라는 4~7세기 한반도에서 세력을 다퉜다. 특히 600년대 삼국은 중국을 오갈 수 있는 중요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

 

당시 '백제'는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북으로 '고구려' 남으로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신라'는 당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나당 연합군을 형성하여 삼국에서 막강한 세력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때, 백제의 의자왕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회만을 즐겼으며, 나랏일을 보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라의 김유신과 당나라의 소정방의 연합군은 백제의 요충지였던 탄현과 백강을 공격했다.

 

 


 

백제의 계백과 결사대

 

이미지 출처 - MBC 드라마 계백

 

하지만 백제에는 계백장군이 있었다. 계백장군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5천여 명의 결사대를 뽑는다. 결사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해 싸울 것을 결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말한다.

 

계백장군은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로 가기 전에 "한 나라의 사람으로 당과 신라의 많은 병사를 당해내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기 어렵다. 내 처자식이 붙잡혀 노비가 될까 두렵구나.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흔쾌히 죽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하며, 자신의 손으로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

 

계백장군과 결사대가 먼저 황산벌에 도착했고 계백장군은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연설을 했다.

 

"옛날 월나라 왕 구천이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 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전쟁의 승리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

 

신라군이 황산벌로 오면서 두 나라의 전투는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계백장군이 이끈 결사대는 5천여 명으로 김유신의 5만여 명의 신라군에게 4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어린 화랑을 희생시킨 신라

 

이미지 출처 - MBC 드라마 계백

 

결사대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게 된 신라군은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고, 신라 장수들은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어린 '화랑'들을 적진에 홀로 뛰어들게 했다.

 

김흠춘은 자신의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신하에게는 충성만 한 것이 없고, 자식에게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두 가지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김흠춘의 아들인 반굴은 "삼가 분부를 알아들었습니다"라며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김품일이 자신의 아들인 관창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뜻과 기개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쏘냐?"

 

김품일은 말 앞에 관창을 세워두고 여러 장수들에게 "내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관창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쥐고 백제군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이미지 출처 - MBC 드라마 계백

 

하지만 계백은 관창을 살려서 돌려보냈고, 신라는 계속 관창을 다시 적진으로 보냈다. 여러 번 살려서 돌려보냈음에도 계속 공격을 해오자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신라 진영으로 보낸다.

 

김품일은 그걸 보고 "내 아이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로다!"라고 하였고, 어린 화랑 두 명의 죽음을 본 신라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신라는 이런 군사들을 이끌고 총공격을 하였고, 결국 계백장군과 그의 5천 여명의 결사대의 대다수는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시킨 뒤, 의자왕과 백제의 백성 13,000명을 잡아갔다.

 

백제는 의자왕이 잡혀간 후에도 풍왕과, 부흥군이 일어나 저항하였으나 결국 멸망하였다.

 

 


 

이미지 출처 - MBC 드라마 계백

 

항상 어린 학생들의 용기와 희생은 승자와 패자를 바꾸었다. 언제나 학생들의 희생은 많은 사람들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반골과 관창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어린 영웅들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어른들의 욕심으로 인해 뜻도 펼치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다.

 

경험과 지혜를 앞세워 권력을 독점하던 사람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그 희생자가 청년들이었을 때 파급력이 항상 컸다.

 

당시 신라군은 우세한 상황이었고, 능력이 있었던 어린 인재 두 명을 그냥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견을 들어 더 지혜로운 전략을 세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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