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전투, 와키자카 야스하루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김시민 장군 등 왜적을 상대로 이긴 영웅들과 그들의 전투만을 기억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막아냈지만 많은 전투에서 패배했고, 20여 일만에 도성인 한양을 점령당했다. 당시 조선이 얼마나 무능하고, 붕당정치로 나라가 어지러웠는지 보여준다.

 

용인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전투 중 하나이며, 일본군에게 대패한 최악의 역사로 남은 전투이다.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끈 1600명의 군사에게 무려 5만 명(일본 기록상 10만)의 조선군이 개죽음을 당했다. 조선의 지도층은 5만 명의 군사를 믿고 자만했던 것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1600명의 군사

 

이미지 출처 - 명량

 

용인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약 두 달이 된 때(1592년 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전라도순찰사인 이광과 충청도순찰사인 윤선각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1600명의 일본군에게 참패를 한 전투이다.

 

이 전투를 이끈 왜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권을 다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칠본창의 한 명으로 이름을 떨친 명장이다.

 

그는 39세에 임진왜란에 출전했고, 처음에는 해상수운과 수군 관련 업무를 맡았으나 원균의 경상해역이 쉽게 평정되자 곧바로 육군에 참가해 북상했다.

 

 


 

이광과 삼도 민병군 5만 명

 

남도근왕군

 

신립은 조선군의 상징 같은 장수였다. 그런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하고, 일본군은 북상하여 한양을 점령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도를 점령하는 데 20일도 걸리지 않았다. 당시 선조는 의주쪽으로 몽진했다.

 

전라도순찰사 이광은 급하게 4만 명의 민병을 모아서 북진 계획에 대한 장계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충청도와 경상도순찰사에게 전라도순찰사와 온양에서 합류하여 한양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온양에서 합류한 군대는 전라도군 4만 명, 충청도군 8000명, 경상도군 1000명 등 약 5만 명이었다. 이 인원은 개전 이래 가장 많은 병력이 모인 것으로 군기와 무기, 군량미를 실은 수레의 행렬이 15~20km에 달할 정도였다.

 

 


 

최악의 전투, 용인전투

 

 

이광이 이끄는 삼도 민병군은 남도근왕군으로 불렸다. 이 근왕군은 북상하여 수원 독성산성을 전쟁 없이 점령했다.

 

엄청난 규모의 조선군을 보고 일본군이 용인으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 중 주력인 1000명은 한양에 주둔하고, 600명은 용인 부근의 북두문산과 문소산 등에 진을 쳤다.

 

용인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한 작전회의에서 광주목사로서 참전했던 권율은 "적진은 험한 곳에 위치하여 공격하기 어렵다. 한양이 멀지 않고 큰 적이 눈앞에 있다.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자중하여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의 적들과 칼날을 다툴 것이 아니라 오직 '조강'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조강 :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

 

 

그러나 의견이 분분했고, 이광은 결국 곽영에게 조방장 백광언과 이시지에게 각각 1000명씩 붙여 선봉부대를 편성하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조선군의 공격에도 일본군은 진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중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양에서 주력인 1000명을 이끌고 용인에 도착해서 기운이 풀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조선군을 기습 공격했고, 이때 백광언과 이시지는 전사하고 조선군은 놀라서 도망쳤다.

 

 

 

이미지 출처 - 명량, 쇠로 된 탈

 

다음날 선봉부대가 무너지자 이광의 주력군은 수원의 광교산에 진을 쳤고, 아침밥을 지어먹기 위해 불을 피워 연기가 올라갈 때 일본군의 기병대가 급습했다. 일본 장수들은 얼굴에 쇠로 된 탈을 쓰고, 백마를 타고 와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충청병마사 신익이 먼저 놀라서 도망쳤고, 뒤를 이어 군사들도 도망치기 시작헀다. 이광과 곽영 등 지휘관들도 모두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군사들이 깔려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 광경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라고 기록했다. 결국 조선군은 5만 명으로 일본군 1600명에게 대패하였다. 질서를 유지하던 권율의 부대만이 살아남았다.

 

이광은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약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와키자카는 "조선의 장수는 어리석고 무능하다"라고 곧잘 말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조선은 용인전투에서 지휘관은 무능함으로 어이없이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조선은 전쟁에서 패하고 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지도층은 패배에 대한 반성과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긴 전투만 내세우면서 적국에 대한 증오심만 가져서는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뿐이다. 조선은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고도 끝까지 고집을 세우며, 당파싸움만 하다가 결국 일제강점기를 겪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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