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제

 

중국은 약 3세기 반 동안 분열되기를 반복했다. 진나라가 삼국통일을 했으나, 일시적인 통일이었을 뿐 사분오열이었다. 45개 왕조의 235명의 군주가 이 시대에 탄생하고 멸망했다.

 

한족이었던 양견의 아버지 양충은 선비족의 독고신의 부하였고, 우문각의 쿠데타를 도와서 북주를 성립시켰다. 양충은 공로를 인정받아 '수국공'에 봉해졌고, 북주의 실권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양견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스물도 안된 어린 나이에 표기장군이 되었고, 독고신의 딸인 독고가라(독고황후)와 결혼하여 선비족과 한족에서 지지기반을 쌓았다.

 

그리고 양견의 사위(우문윤)가 황제(선제)가 되면서 양견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이때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주가 중국 북부를 통일했다.

 

북주의 명제와 선제는 양견을 견제했으나 제거할 기회를 잃었고, 정제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선제는 황제자리를 물려주고 1년 만에 병사하였다.

 

양견은 선제의 유언을 위조하여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 있던 우문씨 다섯 왕의 도전을 무찌르고 수왕을 거쳐 정제의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수왕조를 세웠다.

 

 


 

수문제의 수왕조

 

 

수문제는 즉위한 후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자신의 외손자인 정제와 우문씨 일족을 몰살시켰고, 그 과정에서 혼맥으로 얽힌 다른 여러 귀족까지 몰살당하여 엄청난 원한과 반발이 일어났다.

 

수문제는 이 난관을 이겨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이용했다.

 

첫 번째, 통일전쟁을 하였다. 수문제는 형주 지역을 차지하던 후량을 멸망시키고, 진나라마저 멸망시키면서 통일을 이루었다.

 

진나라의 강남 지역이 최대의 곡창 지대였기 때문에 수나라는 세금을 낮추고도 풍족한 세입을 확보했고, 항복한 진나라 귀족을 화북 군벌들에 맞설 세력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문벌귀족의 기득권에 맞서 왕권을 강화할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두 번째, 엄격한 법 집행 원칙을 세웠다. 수문제는 황족이라도 불법을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았고, 자신을 모독했더라도 법조문에 규정된 이상의 처벌을 하지 않았다. 582년에 편찬한 개황률은 후일 중세 동아시아의 법률적 틀인 당률에 뼈대가 되었다.

 

 


 

수나라, 부부의 공동통치

 

 

당시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정치의 중심에 서는 일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수문제는 정치를 자신의 아내인 독고황후와 함께 의논하여 결정했다. 독고홯후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정치적 조언자였고, 그녀의 의견은 내치에 잘 반영되었다.

 

당시 수문제와 독고황후는 두 분의 성인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수나라의 두 황제라고 칭하기도 했다. 사치를 금지하고, 법령을 엄격히 세우는 등 수문제의 여러 개혁정책은 독고황후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자신의 형제와 친척들을 엄격하게 단속하였으며, 죄를 지었다면 자신의 아들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또한, 독고황후는 황후라는 지위를 가졌지만 원로대신들에게 예를 갖추어 대하였고, 수나라의 국사를 논할 때마다 잘못된 점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문제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설득하고, 바로잡아주었다. 

 

 

 

 

그래서인지 수문제는 독고황후가 죽은 뒤 무능한 면을 많이 보였다고 한다.

 

자신의 조력자이기도 하고, 감시자이기도 했던 독고황후를 잃은 수문제는 평소 의심 많던 성품이 극대화되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간신으로 몰아 죽었다. 법을 엄격히 집행한다는 원칙 또한 버리고 잔혹한 처벌만 내렸으며, 매일 직접 사람을 매질했다. 

 

그리고 그동안 독고황후에 인해 두지 못했던 후궁도 여럿 들여서 향락을 일삼았다.

 

독고황후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수문제가 명군, 성군으로 남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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