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나라의 문화를 없애려고 했다. 우리 선조들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일본에게 저항했다.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했던 것 중 하나가 창씨개명이었다.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한 것이다. 우리 이름을 못쓰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는 목숨을 걸로 저항하였고, 시인이나 작가는 펜으로 저항했으며, 자산가들은 뒤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주는 등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항할 힘이 없었고, 나약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순순히 응하지는 않았다. 획기적으로 일본에 빅엿을 먹였다.
민족말살정책인 창씨개명과 압박
민족말살정책이란 우리 민족을 완전히 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역사를 연구하거나 교육하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모든 학교 수업을 일본어로 하였고, 일본사를 가르쳤다.
황국신민의 서(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짐하는 글)를 외우게 했고, 일본 신사에 참배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시켰으며, 정치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 민족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창씨개명이란 조선인의 조선석 '성'을 일본식 '씨'로 만들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고유문화를 확립해야 한다는 핑계로 시행했지만 사실은 부계혈통 중심의 가족 개념을 파괴하여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자 했던 것이다.
심지어 창씨개명을 신청받으면서 수수료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조선인들이 창씨개명 신청을 하지 않았고, 일본은 창씨하지 않은 사람을 공사를 불문하고 채용하지 않고, 현직자도 파면 조치했으며, 그들의 자식은 학교 입학이나 진학을 거부하거나 창씨하지 않은 아이를 교사가 이유 없이 구타하여 부모가 창씨개명을 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으로 단정하여 미행을 철저히 하고, 동시에 노무징용의 대상자로 하며, 식량 및 기타 물자의 보급대상에서 제외했다.
너의 이름은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선조들은 받아들이면서도 저항했다.
어떤 문중에서는 평산(平山)을 히라야마로 바꾸는 식으로 본을 같은 씨로 바꿔 혈통을 유지하려 했다.
일부 사람들은 개자식이 된 단순의 자손이라는 뜻의 '이누코 구마소', 개똥이나 먹어라라는 뜻을 가진 '이누쿠소 구라에' 등 조롱 섞인 이름으로 개명하여 반감을 표시했다.
그중 가장 사이다였던 이름은 바로 천왕의 이름을 풍자한 것이었다. 당시 천왕은 '쇼와 덴노'였다.
그의 본명은 '히로히토'이고, 어린 시절 쓰이던 궁호는 '미치노미야'였다. 이것을 합쳐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라고 창씨개명을 신청한 것이다. 자기나라 천왕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도 조롱이고,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면 얼핏 미친놈이야 히로히토가 되기도 한다.
이 사람들의 개명신청은 당연히 거절당했고, 끌려가서 폭행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단식하거나 음독, 투신자살 등 목숨을 걸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의 뿌리를 위협했던 창씨개명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폐지되었고, 이듬해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자'로 끝나는 이름이 많은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때의 영향이 남아있다.
이름이 '자'로 끝나는 이유는 많은 일본 사람들이 여자 이름의 끝을 '꼬(子)'로 짓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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