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 무쿠리 고쿠리

 

일본은 많은 전쟁을 일으키며, 학살과 겁탈을 행했다. 그러나 그런 일본도 학살을 당했고, 겁탈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바로 여몽연합군(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정벌에서 일어난 일이다.

 

몽골은 그 당시 유라시아 국가를 짓밟았고, 고려도 공격했으나 고려의 수군 때문에 결국 화친을 맺게 된다. 그리고 몽골은 일본에도 사신을 십여 차례 보냈다. 일본은 그들을 거부하며 사신들을 구류하거나 피살하기도 했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전함을 건조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여몽연합군은 일본으로 원정을 떠난다.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외 침공을 받았고, 사실상 전투가 아닌 학살에 가까웠다. 그리고 여자들을 겁탈하는 수준도 상상 이상이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무쿠리(몽골) 고쿠리(고려)라는 말이 생겼다. 규슈 북부에 위치한 이키섬에서는 예로부터 밤에 아이가 울며 떼를 쓰면 "무쿠리 고쿠리 도깨비가 와서 잡아간다"며 겁을 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이키섬뿐만 아니라 일본 서부지방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으며 주로 무서운 것을 가리킬 때 비유해서 쓰인다.

 

 


 

여몽연합군의 원정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 여몽연합군 일본 침공

 

1275년 몽골군 2만 5000여 명, 고려군 1만 4000여 명으로 구성된 여몽연합군은 쓰시마섬 남단의 사스우라와 이키섬에 상륙한다. 단 몇 시간 만에 일본군은 전멸했으며 이키섬을 점령한다.

 

병력 차이도 있었지만 전략이나 무기 모든 면에서 여몽연합군은 일본군을 압도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일본은 국가가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대외 침략을 받아본 적 없었기 때문에 여몽연합군의 전술이나 무기에 대해 무지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장수가 한 명씩 나와 일기토를 벌인 후, 접근전에 돌입하는 구식 전술을 사용했으며 특히 이키섬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이름부터 가문의 유래까지 한참을 이야기하고 일기토를 청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여몽연합군은 활을 쏴서 고슴도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구시대적인 전쟁 방식으로 인해 일본군은 단 몇 시간 만에 전멸한다.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이키섬을 정벌한 뒤, 그대로 규슈 해안 일대로 밀고 들어가 상륙한다. 그 지역을 총괄하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총사령관인 '쇼니 쓰네스케'는 1만 7000여 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고려군이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 대로 일본군을 쓰러뜨리며 하카타만 일대 방어선을 전부 붕괴시킨다.

 

일본군은 참패를 이어갔고, 결국 퇴각해 규슈의 중심지인 다자이후 일대에 모여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다음 날 기적과 같은 대 폭풍이 몰아쳐 여몽연합군 군함 200척이 가라앉았다.

 

그 태풍으로 인해 결국 여몽연합군은 고려로 돌아갔다.

 

1차 원정이 태풍으로 허무하게 끝난 후, 몽골은 더 많은 준비를 한다. 몽골군 1만 명, 고려군 3만 7000명, 강남군 10만 명으로 2차 원정을 떠난다. 일본 전역을 토벌할 대전력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갑작스럽게 불어온 태풍으로 실패로 끝이 난다.

 

 


 

카미카제(神風)

 

 

일본에서는 카미카제, 신의 바람이라는 말을 줄곧 한다.

 

그 당시 여몽연합군은 일본군의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좁은 일본 해안지대의 특성을 파악해 사무라이 기병대를 무력화시킬 도검병과 화포를 투입했다. 일본은 당연히 화포의 존재조차 몰랐다.

 

만약 태풍이 불지 않았다면 일본은 없었을 것이고, '무쿠리 고쿠리'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신이 보낸 바람이라고 항상 말하는 이유는 정말 신이 도운 것처럼 바람으로 인해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다.

 

 


 

학살과 겁탈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여몽연합군은 일본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겁탈했다.

 

남자와 아이들은 모조리 죽여 목을 베었고, 여자들은 손바닥을 뚫어 줄로 메고 다니면서 겁탈한 후 처참하게 죽였다.

 

또한 배에 태워 몽골과 고려에 보내 첩 또는 몸종으로 삼았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온 가족이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눈앞에서 자신의 가족이 죽고, 계속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상황, 우리가 일본을 증오하듯이 일본도 그 당시 몽골과 고려에 대한 증오심이 심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여몽연합군에 대한 복수심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이 '왜구'라는 호칭을 쓰듯이 일본 역시 여몽연합군을 '원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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