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은 1575년 6월 4일 ~ 1641년 8월 7일 조선 15대 임금이다.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로 태어나 어릴 때 생모를 여의고 선조의 냉대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광해군은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많은 활약을 했으며, 아버지인 선조로 인해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으나 끝내 즉위하였다. 하지만 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광해군은 세자가 되는 것도 매우 험난했다. 그 당시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는 불임이었다. 때문에 왕세자를 서자 중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광해군이 유력했다. 하지만 선조는 자신이 좋아하는 후궁인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또한 서얼이라는 열등감에 빠져있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고,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야사에 따르면 선조는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고,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건저(建貯)문제
선조는 이런저런 핑계로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지만, 세월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러 왕세자 책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의정부 좌의정 정철'은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등과 상의했다.
또한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영의정 이산해'와도 상의하고, 건저(建貯) 주청 문제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긴다.
* 건저(建貯) - 왕위 계승자를 정하던 일
이산해는 선조가 김빈의 소생 신성군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략을 꾸민다.
이산해는 김빈에게 가서 정철이 장차 건저를 주청한 뒤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다. 김빈은 바로 선조에게 이 사실을 울면서 호소했고, 선조는 매우 노하게 된다.
이 사실을 몰랐던 정철은 경연에서 건저문제를 거론하였다. "나라가 어려울 때, 빠른 시일 내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현명하다" 라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했다.
당연히 선조는 크게 노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건저문제를 발설한 서인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 등은 모두 외직으로 강등되었다.
선조 또한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실패한다.
소금이라 대답해 세자로
야사에 따르면, 선조는 시험하기 위해 왕자들을 모두 불렀다.
질문은 "반찬 중에 무엇이 제일 으뜸인가?"였다.
왕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말했다.
하지만 그중 광해군의 답은 이상했다. 반찬이 아닌 '소금'이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소금이라 답한 이유를 물었다.
광해군은 "아무리 맛난 산해진미도 소금이 없으면 백가지의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광해군의 대답에 놀란 선조와 신료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서자였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야사에서는 소금이라 답해 세자가 되었다고 했으나, 사실 기록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을 수습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 모모후쿠,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치킨 라멘'을 만들다. (0) | 2020.11.22 |
---|---|
독일 나치당의 창시자는 히틀러가 아니다? (0) | 2020.11.20 |
태조왕은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산 왕이다. (0) | 2020.11.14 |
프랑스혁명의 시작, 테니스코트의 서약 (0) | 2020.11.12 |
사랑에 미친 낙랑공주, 호동왕자를 위해 자명고를 찢었다. (0) | 2020.11.11 |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