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KBS 징비록 >

 

임진왜란, 왜적이라면 다 치가 떨리고 화가 나지만 조선을 위해 일본을 등지고 싸웠던 일본인들이 있었다.

 

'항왜'라고 불리는데, 그들의 활약이 있어 조선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들 중 조선을 매우 사랑하셨고, 조선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이 계신다. 바로 '김충선' 장군님이시다.

 

김충선 장군은 조선에 투항하기 전 '사야가[沙也加]' 사무라이 정신을 가진 왜적의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조선침략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선으로 귀화하여 조선을 위해 일본에 대항했다.

 

조국의 잘못을 인정하고, 조국을 배신하면서까지 조선으로 귀화해 조선인들을 위해 싸웠던 김충선이라는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김충선[] 사야가[沙也加, ] 1571년(선조4) 1월 3일 일본출생

 

일본에서 자라고 생활했던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2년에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땅을 밟게 되었다.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의 선봉장으로 3,000명의 병사를 통솔하며 내침했다.

 

하지만 사야가며칠 만에 조선의 장수로써 일본과 싸우고 있었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하여 귀순하고 순찰사 '김수' 등을 따라서 경주, 울산 등지에서 적군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사야가는 적진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전공을 높이 사 가선대부(夫) 벼슬을 내렸다. 1593년 그의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게 되는데,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 김해 김 씨로 사정하였다고 한다.

 

이름은 충성하고 어진 마음 '충선(善)' 그래서 그는 조선의 장수 '김충선(善)'이 되었다. 그리고 김충선은 자헌대부(夫)에 오른다.

 

 

 

 

김충선 장군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조총을 잘 다루는 '항왜'들은 조선군 조총 교사로 임명되기도 했고, 그 결과 조선군도 조총을 사용하게 된다. 항왜들은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조총을 비롯해 일본의 신무기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곳곳에서 활약이 컸다.

 

보통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사기가 떨어져 투항한 왜군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야가는 투항한 결심이 그들과는 달랐다. 그의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를 보면 이미 조선을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했다고 술하고 있다.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의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하여 오랑캐의 문화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 자신의 오랑캐의 문화(좌임향, 격셜풍)을 가진 왜국에서 태어난 것을 슬퍼하며 탄식을 했으며, 아름다운 문물을 보기를 원했다.

 

'서불부환 하량으로 의중에 결단하고' 이 가사의 내용을 보면 출병 이전에 이미 귀화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당호를 '모하(夏)'라고 한 것도 조선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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