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원 내부의 게야무라 로쿠스케 영정 옆 '논개 영정'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논개는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안고 함께 진주 남강에 뛰어들어 왜장을 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한 일본인의 잘못된 존경과 공격으로 논개의 혼령이 일본에 떠돌게 되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논개가 일본에서는 죽인 왜장의 첩이 되었고, 심지어 일본에서는 부부금슬과 다산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다행히도 민간단체의 항의로 바로잡혔다고는 하지만 왜곡된 역사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 역사왜곡, 왜장의 첩이 되었던 논개, 어떤 일이었을까?

 

 


 

논개에게 죽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기다 마고베)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기다 마고베)이다.

 

그는 신의 칼이라 불렸던 사무라이이며,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으로 조총병을 이끌고 종군하였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전설적인 사무라이라고 하는데, 그런 위대한 인물이 진주성 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며 술을 퍼마시고, 여색을 탐해 조선의 위대한 여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말 전설적인 사무라인지 궁금하다.

 

그 인물의 명성이 얼마나 큰지 잘 모르겠으나 결국 조선 여성의 손에 부끄럽게 죽었다.

 

 


 

한 일본인의 사기극

 

 

1970년, 일본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는 후쿠오카현에서 한 묘비를 발견한다.

 

그 비석은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것이었다.

 

우에쓰카는 신의 칼이라 불렸던 게야무라의 죽음을 흠모하였고, 그의 부끄러운 죽음을 풀어주려고 묘안을 생각하는 데, 그것은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죽인 논개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그는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한국의 진주를 찾아가 진주 남강에 국화와 천 마리의 종이학을 띄워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지는 초혼 의식을 치른 후 논개의 넋을 일본으로 모셔간다. 

 

논개의 고향인 전북 장수의 화강암을 가져가 '주논개지묘'라 새기고, 친일 화가인 김은호의 '논개'를 묘사한 그림을 가져가 영정으로 썼다.

 

이때부터 논개의 영정과 묘비는 게야무라의 무덤 옆에 게야무라의 아내, 처제와 함께 모셔졌다.

 

우에쓰카라는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죽이고 싶었던 왜장의 첩이 되어 죽어서도 그 혼을 유린당한 것이다.

 

 

 

98년 최경회 장군 후손들이 일본을 방문해 보수원 사용을 못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문을 봉인하는 조치를 취함

 

그 후 논개와 게야무라에 관련해서 일본에서는 '논개 묘비 앞에서 빌면 아이를 잘 낳는다', '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 '일본 장수를 잊지 못한 논개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게야무라와 해로했다'라는 말도 안 되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우에쓰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고, 평소 존경해왔던 일본 장수가 조선의 여인의 계략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믿기 싫어서 내가 역사를 바꾸고 싶었다"

 

이런 사기극을 벌인 우에쓰카에게 그 당시 진주시에서 감사장까지 선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뒤늦은 대응

 

임진왜란

 

우에쓰카의 사기극은 성공했고, 역사왜곡은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나마 뒤늦게 알아챈 한국의 민간단체의 항의로 이 미친놈의 사기극은 끝이 난다.

 

정부와 진주시 당국에서는 영정과 미친놈이 진주에서 가져간 것들을 모두 회수했다고 한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영웅 논개는 두 번 짓밟혔다.

 

일본은 항상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온갖 방법으로 미화하며, 한국의 민족혼을 평가절하하고, 상대적 우월성을 과시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고, 똑바로 알지 못한다면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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