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전쟁 초반에 조선의 장수들은 무기력했다. 방비를 소홀히 한 장수들의 패배는 불 보듯 뻔했고, 군을 이탈하는 인원이 많았다.

 

그 당시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던 최고의 명장이라 소문이 자자했던 신립 또한 패배를 했다. 패배의 원인은 바로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활용을 못했기 때문이다.

 

종사관(從事官) 김여물은 "적은 인원의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며, 정면 전투를 피하고 기슭에 숨어 일제히 활을 쏘아 물리치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신립은 "지역이 험준하여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고 우리 군사의 훈련이 부족하니 들판에서 배수의 진을 쳐야 도망치지 않고 싸울 것"이라 주장했다.

 

 

 

 

결국 조령 방어선을 포기하고, 충주선을 건너 탐금대에 진을 쳤다.

 

훈련된 여진족의 기마병을 조선의 기마병으로 물리친 탓에 자만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탄금대 주변의 평야는 논밭이 많아 말이 달리지 못했고, 비까지 온 탓에 습지에 발이 빠졌다. 결국 조선군은 전멸했고, 신립은 자살했다.

 

반면 권율 장군은 급박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지형을 잘 파악하여 목숨을 건 도박을 하였다. 그 도박은 성공적이었고, 결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적장을 속여, 승리하다.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명나라에서 파병을 하면서 왜군은 점점 미치기 시작했다. 

 

권율 장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양 탈환을 위해 관군 2,300명과 승병 500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그렇게 북상하던 도중 수원 독산(禿山)의 독산성(禿山城)에 주둔하게 된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들은 독산성을 포위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독산성의 조건을 파악한 결과 성안에 물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다.

 

그리고 부하에게 물 한 지게를 권율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조선군에게 도발과 조롱을 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판단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실제로 독산성안에는 물이 부족해 극심한 식수난을 겪고 있었고, 조선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권율은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황당한 명령을 내린다.

 

"쌀을 모두 가져와 성 가장자리에서 말 등 위에 쏟아부어라"

 

말에 쌀을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한 것이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왜군은 쌀을 물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독산성에 물이 넘친다고 생각한 그들은 포위를 풀고 퇴각하기에 이른다.

 

권율은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3천 명 이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을 높이 치하하여 독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를 세우게 된다.

 

 


 

어떻게 적장을 속였는가?

 

독산성 지형

 

생각해보면 눈이 얼마나 나쁘면 쌀이랑 물이랑 구분을 하지 못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독산성의 지형을 보면 이런 의문은 싹 사라진다.

 

독산성은 높이 208m의 나지막한 산 위에 위치하였고, 돌로 지어진 성이었다고 한다.

 

산은 높지 않았으나 오산과 수성,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서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었던 요충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꼭대기는 평평한 구조로 되어있어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왜군의 입장에서는 독산성 안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쌀로 말을 씻겨도 물로 씻기는 것처럼 속일 수 있었다.

 

권율 장군은 신립과 달리 지형을 잘 파악해, 목숨을 건 도박을 했고 그 결과 적장을 속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독산성 전투는 전쟁에서 지형을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사례이다.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