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혔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영조는 정조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사도세자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당시 정조 나이는 고작 11살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인 영조의 명으로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번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대신들과 가족들에 의해 왕위 계승에 방해를 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편안할 날이 없는 불운한 삶을 살았던 왕이다.
그러던 중 1775 ~ 1776년 대리청정을 하였고, 1776년 할아버지인 영조가 죽은 뒤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죽음과 가족들의 배신을 겪었지만 폭군이 되지 않고, 바르게 자라 성군이 되었다.
세손 시절 - 어머니와 떨어져 고된 공부를 한 정조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사망한 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정조가 경희궁에 머물수 있도록 영조에게 요청했다. 이때 혜경궁 홍씨는 창덕궁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정조와 생이별을 하였다. 이후 정조는 국왕이 되는 날까지 경희궁에서 살았다.
정조는 스승인 김종수의 가르침을 받으며, 사서오경과 국내 사서와 한글소설, 그리고 의서까지 다양한 책을 읽었다. 또한,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를 하였다.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들으며 토론하였고, 아동용 입문서에서 시작해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를 강론하였으며, 열 살 이후에는 역사서를 강론하였다.
또한, 경학 못지않게 무예 단련에도 힘썼다. 그는 활쏘기를 즐겼고,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켰다고 한다.
대리청정 시절 - 목숨을 위협받던 정조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노론은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꺼려했고, 당론으로 세손이었던 정조를 제거하려 했다. 때문에 정조는 늘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신경 써야 했다.
그러던 중 1775년, 영조가 노환으로 정무를 보기 힘들어지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그러나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노론 벽파는 대리청정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영조는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기고, 대리청정을 맡겼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홍계희,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의 노론들은 정조의 즉위를 막아보려 시도했지만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영조는 순감군의 수점권을 정조에게 주면서 만약을 대비했다.
즉위 후 - 가족과 친구를 잃은 정조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흉언을 유포시켰고, 이에 보란 듯이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대립하지 않겠다는 뜻을 돌려서 밝히며,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했던 정후겸과 홍인한을 유배 보낸 후 사사하는 것으로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 정후겸 -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의 양자 / 홍인한 - 정조의 외조부의 동생
정조가 즉위한 후 1777년, 괴한이 경희궁으로 침입하여 정조는 창덕궁을 거쳐를 옮겼다. 그러나 다시 괴한이 침입하여 잡고 보니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과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슬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었다.
충신이자 정조가 의지했던 홍국영은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게 하고, 홍슬해와 홍상범에게 사형을 내렸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유배되면서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던 세력은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를 제외하고 모두 제거되었다.
이후 정조는 홍국영에게 많은 권력을 주었다. 정조의 믿음과는 달리 홍국영은 사사로운 관계로 인사를 단행하였고, 정순왕후가 독단적으로 정조의 후궁을 간택하려고 하자 자신의 누이를 원빈으로 들이는 등 권력 강화를 하려고 하였다.
또한, 왕비가 자신의 누이인 원빈을 독살했다고 오해하여 왕비의 음식에 독을 넣으려다 발각되었으며, 은언군의 아들인 상계군 담을 앞세워 왕위 계승권에 관여하려 하였다.
1779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하였고, 정조는 백마와 금전을 주며 낙향시켰는데, 이후 탄핵 상소로 인해 강원도 횡성과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에 사망하였다. 정조는 아꼈던 홍국영의 죽음에 스스로를 탓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불운하게도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잃었고,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다. 뿐만 아니라 고모와 할머니, 그리고 외척세력까지 정조를 배신하여 죽이려 했고, 늘 노론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후에는 자신이 아끼고, 의지했던 홍국영마저 초심을 잃고 그의 곁을 떠났다.
말도 안 되는 비극을 모두 겪었지만 정조는 많은 업적을 남긴 성군이었다. 또한, 끝까지 개혁과 대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환경에 굴복했지만 정조는 끝까지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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