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李鍝)는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여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자 이우는 193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45기생, 1941년 육군대학교 54기생으로 졸업해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중좌(중령) 계급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다음날 히로시마 니노시마에서 사망했다.
이우 왕자 일본으로 전출
1945년 6월 10일, 제국주의 일본도 점점 꺼져가는 등불이었다. 그럼에도 이우 왕자는 중좌(중령)로 진급되었으며 본토결전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우는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했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운현궁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윤원선(관료), 김을한(기자) 등을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하며,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있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끝내 전출하라는 명령을 거두지 않았고, 그를 재촉했다.
둘째 여동생인 이해원에 의하면 이우는 일본으로 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가겠다며 권총을 들고 소란을 피웠고, 그를 가족들이 만류했다고 한다.
원자폭탄에 의해 사망한 왕족
군인이었던 이우는 명령을 어길 수 없었고, 그 당시 대한제국의 입장을 봤을 때 무작정 거절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1945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고, 며칠 후에 히로시마로 이동했다.
이우는 히로시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이(己斐)의 가어전(假御殿)에서 머물렀고, 히로시마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출근했다.
8월 6일, 이우는 자동차로 출근하지 않고,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렇게 참모본부로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 그는 시 중앙부에 있는 후쿠야 백화점 부근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되었다. 폭심지에서 불과 710m 떨어진 곳이었다.
그날 폭발이 끝나고, 오후쯤 혼가와 아이오이교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이 되었다. 발견 당시에는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었고,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밤에 급히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 섬에 있는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었다. 하지만 자정이 넘어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8월 7일 새벽에 고열로 신음하다가 사망했다.
1945년 8월 8일에 유해는 비행기에 실려 경성 비행장에 도착했고, 운현궁으로 운구되어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되었다.
일본인 수행 무관 요시나리 히로무(吉成弘) 중좌는 엉덩이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를 대신하여 자동차를 타고 사령부에 미리 출근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피폭을 면했다. 그는 부관으로서 그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유해를 운구한 날 밤에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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