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사도세자는 조선 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이다.

 

영조의 첫아들인 효장세자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래서 영조는 후사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그러던 중 사도세자가 태어나 영조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영조는 즉시 사도세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그다음 해에 세자로 책봉했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천품과 자질이 탁월하였으며, 재능이 뛰어나 영조가 매우 사랑했지만 자라면서 점차 영조와 생각이 어긋나기 시작하여 결국 둘 사이에 깊은 오해가 생겼다.

 

 


 

사도세자의 무인적 기질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사도세자는 만 2세 때 글을 알 정도로 영특했으며, 기본적으로는 무인적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즐겼고,, 신체적 조건과 무예가 뛰어나 활과 승마를 잘했으며, 힘도 셌다.

 

평소 병서를 많이 읽었던 사도세자는 속임수와 정공법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고, 24세 때는 무예에 관한 책 '무기신식'을 엮었다. 이 책은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후의 '무예도보통지'의 원본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세자는 항상 군복을 입고 다녔으며, 홍역을 앓으면서도 어머니에게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어달라고 할 정도로 무예를 좋아하고, 재능이 있었다.

 

영조는 무예보다는 학문을 중시하여 세자의 강한 성품을 교육으로 누그러뜨리고자 했다. 세자의 기질은 10세 이후에 더욱 강해졌고, 이때만 해도 영조는 화내지 않고 경계하라며 당부했다.

 

영조가 바라는 세자의 모습은 사도세자의 기질과는 달랐던 것 같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흔히 우리나라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원인인 공부로 인해 영조와 사도세자는 멀어지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10세 무렵부터 무인적 기질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고, 반대로 학문에는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엄하게 꾸짖고, "라떼 이즈 홀스(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 하며, 고된 세자의 공부 스케줄을 강행하고 직접 관리했다.

 

* 영조의 "나 때는 말이야" - 내가 세자일 때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두 차례의 연강(筵講)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무인적 기질을 가진 사도세자에게는 영조의 교육방식이 견디기 힘들었고, 점점 영조를 멀리하게 되었다. 12세 때는 영조 앞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작아질 정도로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이런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내 앞에 있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14세 때 시작된 대리청정으로 인해 둘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기질을 사전에 훈련으로 조정하기 위해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도 둘의 성향은 달랐고, 이로 인해 사도세자의 정무적 능력과 수신에 더욱 불만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세자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영조는 사도세자가 4살일 때부터 총 8번의 양위 의사를 밝히며 그를 시험했다.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왕이 양위하겠다고 선언하면 세자는 명을 거둬달라고 석고대죄하며, 빌어야 했다. 사도세자는 양위 파동이 있을 때마다 두려워하면서 철회해달라고 애원했다.

 

사도세자가 22세 때는 영조와의 갈등을 풀고자 스스로 반성문을 써서 승정원에 내렸으나 영조는 반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복만 입고 숭화문 밖에 나가 맨땅에 엎드려 곡을 하여 사도세자 또한 상복을 입고 뒤에 엎드려 있었다.

 

신하들이 왜 이러냐고 묻자 영조는 "승지가 세자의 글을 가지고 와서 글에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이 있다고 하여 얼른 지나쳐 보고 기뻐서 경들을 불러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그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세자를 불러 '네가 깨우친 것은 어떤 일이냐?"라고 물었으나 세자는 대략만 말하고 끝내 시원하게 전달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은 "전하께서 평소 너무 엄격하여 사도세자가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고, 홍봉한은 평소에도 세자가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어도 두려워 벌벌 떨며 알고 있는 내용도 즉시 대답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날 사도세자는 뜰로 내려가다가 기절했고, 청심환을 먹고 한참 뒤에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사도세자는 20세 무렵부터 정신적인 질환을 앓았다. 약방 도제조의 말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랬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서 옷을 입지 않으려고 하여 결국의 의대증이 나타났다. 의대증으로 발작할 때는 궁비와 내시를 죽였고, 죽인 뒤 후회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영조는 엄하게 책망하였고, 사도세자는 무서워서 병이 더욱 심해졌다.

 

사도세자가 죽게 된 임오화변은 나경언이 올린 고변서로 인해 발생했다. 고변서에는 사도세자가 변란을 꾀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후궁인 양제 임씨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다, 사도세자가 시전에서 많은 돈을 빌렸다는 등의 사도세자의 허물 10여 가지가 낱낱이 거론되어 있었다.

 

고변서의 내용 중 역모 주장은 영조도 믿지 않았고, 나경언 또한 사도세자를 모해하려 했음을 인정하여 결국 나경언은 참수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고변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여러 가지 비리를 상세하게 알게 되었고 분노했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었다. 실록에는 뒤주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안에다 엄중히 가두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사도'

 

사도세자의 심정을 나타내는 사료가 남아있다고 한다.

 

왜 동물을 죽였냐는 영조의 물음에 사도세자는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상처를 받았냐는 영조의 질문에 사도세자는 "아바마마께서 사랑해주시지 않아서이옵고, 또, 아바마마께서 늘 저를 꾸짖으시니 소자는 아바마마가 무섭사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영조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자신의 아들을 높게 평가하고,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엄격하게 교육을 시킨 것 같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아무리 무예에 재능이 있고, 강인한 기질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아들이었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아들을 강하게 키우려는 것과 아들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 이 글을 보시는 아버지가 있다면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본심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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