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큰 문제였던 붕당정치를 탕평으로 해결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몸소 실천하여 높이 평가받고 있는 영조대왕도 콤플렉스를 가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였다. 신분제를 중시했던 조선에서 항상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자격지심을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가 왕이었지만 어머니가 무수리였기 때문에 영조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는 궁에서 살지 않고, 사가에서 살았다. 서자들도 무시받던 세상에서 영조도 어쩌면 일반 백성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조는 의심이 많았고, 더욱 학업에 집착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방계라는 이유로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더욱 자신을 채찍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가에서 살았던 것이 단점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었고, 백성들에게 필요한 정치를 할 수 있었다.
* 무수리 - 천민으로 대개 궁녀들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거나 잡 심부름을 하는 종.
* 탕평 -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무리 짓지 않으며, 왕의 뜻에 따라 탕탕평평한 상태. 영조는 탕평책을 알리기 위해 탕평채라는 음식까지 만듦.
불안했던 세자 시절
영조는 세자 시절부터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했고, 작은 실수에도 왕세제의 자리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 조심해야 했다.
특히, 경종 시절 신임옥사가 일어나서 소론의 공격으로 인해 60여 명의 노론이 처형당하고 170여 명이 귀향을 가는 등 노론의 사대신이 희생되면서 영조는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며, 역모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이후 영조는 인원왕후의 뒷배와 경종의 사망으로 인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초부터 경종을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루머에 시달렸다.
또한,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군사를 일으키자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나주벽서사건'을 겪는다.
이런 일을 겪은 영조는 콤플렉스가 더욱 강화되었다.
대리청정
1752년(영조 28년), 이산(훗날 정조)이 태어나고 영조는 원인불명으로 병석에 눕게 된다. 그리고 사도세자에게 시험삼아 명을 내려 대리청정을 하였다.
사도세자는 일방적인 노론의 의견을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다. 그리고 노론이 이인좌의 난과 관련해 소론인 이광좌 등의 처벌과 추탈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
여러 사건들로 볼 때, 사도세자는 소론에 우호적인 입장인 것으로 보였다. 노론은 영조에게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방계 출신이었던 영조가 직계 출신인 사도세자에게 위협감과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늘 자신의 정통성으로 인해 불안함을 느꼈던 영조가 자신을 옹호하는 노론보다 반대편인 소론에 우호적인 사도세자에 대해 의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런 영조의 마음을 노론이 이용한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탕평을 이루고자 했던 영조 입장에서 소론 편을 드는 사도세자가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양위 파동
양위란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왕들은 이런 양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 실제로 양위할 의사가 없으면서도 왕이 양위를 하겠다고 하면 세자와 신하들은 죽을 힘들 다해 이를 만류해야 했다.
영조 또한 이런 양위 파동을 이용했다. 그는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 5회, 대리청정이 시작된 후 3회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세자를 괴롭혔다. 심지어 사도세자가 4살 때도 양위하겠다고 하였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두려워하며 철회를 애원했다. 그리고 대리청정이 시작된 지 3년 뒤에 양위 의사를 밝힌 영조는 이를 만류하는 세자에게 "네 효성이 밝혀지면 너를 위해 명을 거두겠다"며 '육아시'를 읽게 했다.
* 육아시 - 어떤 효자가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아름다운 채소로 알았지만 살펴보니 쓸데없는 잡초였는데,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
세자는 시를 읽으며 끝부분에는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고, 그제야 명령이 철회되었다.
이 외에도 양위 파동으로 인해 사도세자는 석고대죄를 하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만류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조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능력이 없으니 능력 있는 세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기겠다'는 식의 마음에도 없는 양위 의사를 밝혀 세자와 신하들의 효심과 충심을 확인하려 한 것 같다.
영조는 훌륭한 왕이기 이전에 나약한 인간이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일과 학문에 끝없는 노력을 쏟았다. 또한,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으며, 실천했다.
그는 누구보다 붕당정치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펼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끝내 없애려고 했던 붕당정치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죽음까지 몰고 갔다.
영조는 의심이 많고, 영리하여 웬만한 농간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가 유독 아들인 사도세자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마음속 깊이 박힌 콤플렉스 때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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