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淵蓋蘇文)은 고구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그 당시 고구려는 영양왕과 함께 강력한 고구려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수 문제와 수 양제가 각각 30만 대군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모두 물리쳤으며 수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봤다.
영양왕은 열세한 상황임에도 수나라에 선제공격을 하여 승리하는 등 고구려에 대한 위상을 드높였다.
하지만 그 위상도 잠시였다. 영류왕이 집권하자 고구려는 당나라에 대한 저자세 외교를 펼쳤다. 그리고 칼보다는 붓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장수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은 눈엣가시였고, 그가 두려웠기에 대신들과 모의해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사전에 눈치를 챘고,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삼국사기>에 보면 영류왕 631년에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고 있었다. 영류왕은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영류왕은 연개소문과 정치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일부러 그를 국경으로 보냈을 것이다.
영류왕은 영양왕과 달리 친당 정책을 펼쳤으며, 고수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다방면에서 서로 교류했다.
624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에 책봉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당나라는 갑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사신 진대덕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이긴 사건을 기념하는 승전탑을 허물고, 전사자의 유골을 모아 장례를 치렀다. 또한 고구려군에 잡힌 수나라 군사들을 만나며 고구려의 실정을 조사했지만 고구려는 항의 한 번 하지 않았고, 추방도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고구려의 일부 대신들은 불만이 많았다. 연개소문 또한 이런 점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기록은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상황을 통해 유추해보면 연개소문은 아버지가 전 막리지였고, 가문이 힘이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막강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류왕과 그의 세력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고, 결국 그를 제거하기 위해 모의를 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사전에 이를 눈치를 채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이 통솔하는 군 사열식에 대신 100여 명을 초대했다. 그리고 화려한 식이 거행되던 중 부하들에게 신호를 내렸고, 100여 명의 귀족들은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이후 대궐로 달려가 영류왕을 죽이고, 그의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였던 장(臧)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데 그 왕이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다. 그리고 자신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오른다.
대막리지는 고구려 말기에 행정과 군사권을 장악한 가장 높은 벼슬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추대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국사는 연개소문이 처리했다고 보면 된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는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침입을 받았음에도 고구려는 무너지지 않았고, 잘 버텨냈다.
그러나 국가를 잘 운영하는 것과 별개로 연개소문이 오랜 시간 독재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때문에 연개소문이라는 리더가 죽자 고구려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끝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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