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이산해

 

이산해(李山海)는 한산 이 씨 명문가 출신으로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이고,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조카이다.

 

조선 붕당정치의 중심이자 북인의 수장으로 학문적·정치적 위상을 가졌던 관료였다. 한 세력의 수장이었던 이산해는 다른 인물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류성룡이나 윤두수에 비해 비중이 없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 패배한 당파였던 북인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그는 많은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쓰는 사람(신동)으로 불렸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실용을 중시한 학자였다.

 

 


 

글을 잘 쓰는 사람(신동), 이산해

 

이산해 초상(좌) / 이산해 글씨(우)

 

이산해가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우는 소리를 듣고 작은 아버지였던 이지함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기특하니 잘 보호하십시오. 우리 문호가 이로부터 다시 흥할 것이오."라고 했다.

 

이지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산해가 5세 때, 처음 병풍에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운필(運筆)하는 것이 귀신같아서 신동이라 불렸다.

 

* 운필(運筆) - 글씨를 쓸 때 붓을 대고, 옮기고, 떼는 방법

 

 

 

토정 이지함

 

이지함이 그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기특하게 여겨서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는데, 한 마디의 말로 곧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아서 태극도를 가리키면서 따져 묻고 비판할 수 있는 이치에 이르렀다.

 

이산해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자함이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염려해 그를 막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 대신 밥을 기다리는 동안 운자(韻字)를 불러주고 시를 짓게 하였는데, 거침없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밥이 더디 되어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배움이 더디면 어떻겠으며

배가 고파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떠하랴?

집은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치료할 약은 있는 법이니

모름지기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하리.

 

 

 

조선 팔문장(八文章)

 

6세에는 글씨를 잘 써서 '서소문자대필(西小門子大筆)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가 15세가 되기도 전에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장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과를 응시할 수 있었으나, 바로 응하지 않고 이지함의 옆에서 글과 학문을 계속 수학했다.

 

* 향시(鄕試) - 지방에서 실시하던 과거의 초시, 여기에 합격해야 서울에서 복시(覆試)를 치를 수 있었음

 

 

이산해의 문장은 나날이 발전해 '팔문장(八文章'의 한 명으로 칭송되며, 서화에도 능하여 대자와 산수묵도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자만하지 않고 계속 학문을 닦았다.

 

*팔문장(八文章) - 조선 중기에 널리 문명을 날리던 8대 문장가

 

 


 

북인을 형성하다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 이산해와 류성룡

 

이산해는 이지함의 옆에서 학문을 수학하다가 남명(南溟) 조식(曺植)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어 수학했다. 그리고 그는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했다.

 

특히 그는 조식의 문하에서 만난 김우응, 정구, 곽재우, 정인홍 등과 함께 북인을 형성한다.

 

류성룡은 이황의 문하에서 만났는데 그와는 잘 맞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와 같은 동인의 창당에 참여하지만 사사건건 대립하며 뜻이 달랐다.이후 다시 향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생원시에 응시하게 되어 합격하고, 생원이 되었다.

 

그리고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다시 수학하였다.1561년(명종 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에 보임되었다. 그의 정치가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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