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Theodore Roosevelt. Jr.)는 1858년 미국의 정치인이자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공적이 많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다.

 

별칭은 테디(Teddy), 테오도어, 테오도르 루스벨트라고도 불렸다.

 

러시모어산 큰 바위 얼굴에 조각되어 있는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에서 혁신주의를 내걸고 소수 기업의 독과점 철폐, 철도 운영의 국가 통제를 했다. 또한 재벌과 노조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노동자 보호입법과 동시에 폭력적인 노조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했다.

 

대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의 장기간 갈등을 겨우 종식시키고, 대통령 및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여 기업과 노조를 동시에 통제하는 정책을 추진했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셔먼 독점금지법을 사용하여 대기업들이 무분별하게 비대해지는 트러스트를 견제했다. '자본주의가 도를 넘어 거대기업의 횡포조차 감시, 관리하지 못하면 미국에도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1904년에는 모로코 문제(모로코 지배를 둘러싼 프랑스, 독일의 갈등) 중재와 러일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어릴 때 몸이 약했다. 만약 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렇게 위대한 대통령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탄생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아버지의 사랑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어릴 때 몸이 허약했다. 간질, 발작, 폐렴, 천식 등 잔병치레가 심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시어도어 시니어는 병약한 아들이 발작을 하면 데리고 나가 마라톤을 하였다고 한다.

 

병에게 지지 않고, 싸워서 이기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아들을 마차에 태워 직접 말을 몰아서 마을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시작한 운동이 평생을 이어갔고,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강인한 체력과 정식력을 얻게 된다.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간질과 발작, 폐렴, 천식 등은 서서히 낫게 되었고, 그의 몸에는 근육과 복근이 생겼다. 아버지와 아들은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편지

 

그런데, 아버지 역시 몸이 약했었다고 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컬럼비아 로스쿨에 재학할 무렵 4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편지를 썼고, 임종 직전의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너를 만나서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모른단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듯 대학 시절에는 럭비 등 운동부 선수로 활동했었다.

 

1882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뉴욕 주 하원 의원이 되었고, 곧 공화당의 중진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다.

 

1895년 37세에는 뉴욕 주 경찰청장에 임명되었다.

 

1895년에는 미국 국방부 해군담당 차간보로 발탁되었다.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에는 '러프라이더 연대'라는 별명을 가진 민병대 제1 의용 기병대를 조직했다. 민병대를 이끌고 쿠바로 건너가 케틀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산티아고 전투를 수행해 스페인과 쿠바인 연합군을 크게 격파했다.

 

1898년에는 특별히 미 육군 대령으로 임관되었고, 그해 12월 뉴욕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00년에는 미국의 제25대 부통령이 되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1901년 9월 14일 매킨리 대통령의 암살로 제26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취임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이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연소로 취임한 대통령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아버지가 그를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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