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군인, 박정인 백골부대장

 

박정인 前 백골부대 3사단장은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 출생으로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 6·25전쟁 당시 육군본부 작전장교로 복무했다. 낙동강 방어전에서는 6사단 19연대 작전주임으로 전술적 판단력을 발휘해 작전성공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1952년 보병 제12사단 37연대 1대대장으로 많은 활약을 했으며,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고 한다.

 

1963년 육군본부 작전과장, 1966년 육군본부 군사처장, 1968년 울산특정지역 경비사령관, 1971년 보병 제33사단장을 거쳐 1972년 보병 제3사단장(백골부대)에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박정인 백골부대장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박정인 사단장의 3.7 완전 작전

 

 

1973년 3월 7일 오후 1시 20분,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에서 북한이 기습 총격을 가했고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긴급 보고를 받는다.

 

북한은 표지판 정기 보수작업을 마치고 복귀하던 백골부대원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그로 인해 황정복 대위, 김윤복 중사, 서휘수 병장 등이 총상을 입었다.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응징책을 준비시키고, 현장으로 달려가 마이크로 사격 중지 요구를 했다.

 

"차후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민군 측에 있다" 라며 몇 차례 경고를 했으나 북한의 총격은 멈추지 않았고, 부상자와 소대병력은 위험지역에 있었다.

 

이때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결단을 내린다. 관측기를 상공에 띄워 적 벙커 559GP를 표적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즉각 휘하 사단 포병대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다.

 

 

 

 

105mm, 155mm 견인포가 적 진지를 향해 일제히 포탄을 쏟아부었다. 북한은 겁에 질려 즉시 달아났다고 한다.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6·25 전쟁 휴전 후, 북한 지역에 처음으로 포격을 가한 지휘관이 되었다. 부상자와 소대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백린 연막탄도 동시에 발사했다.

 

이 연막탄으로 일대에 불이 붙자 지뢰들이 연이어 폭발했다.그날 밤,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도발을 하면 얼마나 가혹한지 본때를 보여준다.

 

 

 

 

사단 내 모든 군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한꺼번에 DMZ 남방한계선까지 돌진했고, 일부 차량들은 군사분계선까지 밀고 갔다고 한다. 그 당시 김일성은 파티를 즐기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서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북한군의 피해 상황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975년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백골 포병부대의 포탄 1발이 정확히 막사에 명중해 인민군 36명이 사망했다"며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었다.

 

북한의 도발에 가장 속 시원하게 해결한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1973년 4월 3일 사단장 직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고, 상부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따른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이임식에서 짧게 소감을 밝혔다.

 

"북진(北進)통일의 성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사단장 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백골사단 장병은 나의 의도를 받들어 선봉사단과 북진통일의 임무를 기필코 완수할 것을 당부하며 백골사단의 건승과 장병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한다."

 

 


 

용맹한 군인은 아군에게 죽는다

 

이미지 출처 - 영화 '1급비밀'

 

대한민국에서 용맹한 군인은 다 옛말이다. 전투나 탁월한 작전능력으로 군인은 출세하지 못한다. 부대 내 사고 방지에만 공을 들이거나 오로지 진급만이 목적인 군인들이 출세를 한다.

 

박정인 백골부대장은 용맹했고, 작전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참군인이었으나 아군의 손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그는 백골사단에 사단장으로 취임한 날 ' '전 장병 철모 착용'을 명령 1호로 하달했고, 연이은 2호 명령은 '총기 거치대 자물쇠 제거와 실탄 장전'이었다. "백골!" 경례 구호도 부활시켰고, 총검술 훈련도 항상 북쪽으로 하게 하였다. 심지어 야외 화장실조차 북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또한 '모든 일을 전투 기준으로', '죽어서도 백골이 돼도 조국과 민족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백골용사 선서문을 만들어 복창케 했다.

 

그의 회고글에서 "나는 나의 판단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북한 공산당들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더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포격을 퍼붓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발의 포도 우리 쪽에 발사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