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대한민국 경찰, 치안감 '안병하'

 

안병하(安炳夏, 1928년 7월 23일 ~ 1988년 10월 10일)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경찰이다. 제37대 전라남도 지방경찰청장을 지냈으며,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해서 강제로 직위 해제당했다.

 

그리고, '육군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휴유증으로 투병생활 끝에 1998년 10월 10일 사망했다.

 

육군 보안사령부는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가 2018년 9월 1일 해제하고 새로운 군사 안보 부대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를 창설했다.

 

 


 

안병하 치안감, 걸어오신 길

 

춘천 전투 / 장교시절 맨 오른쪽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김종필 前 국무총리 동기)로 임관하여 제 6사단 포병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 당시 안병하 중위가 위험한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임무를 완수하고, 적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데, 그 전투가 '춘천 전투'였다. 그는 공을 인정받아 1961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62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고, 같은 해 총경 특채로 경찰이 되었다.

 

 

 

안병하, 진정한 공직자

 

부산 중부경찰서장, 서울 서대문경찰서장을 역임하고, 1968년에는 남파 간첩선을 타고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를 소탕한다. 그 공을 높이사 '중앙정보부장 표창'과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1979년 2월 전라남도경찰국장이 되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 이로 인해 직위 해제되었고, 보안사령부는 안병하를 연행하여 고문하였다.

 

그리고 1980년 6월 2일 강제 사직 당한다.

 

 


 

시민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군내 사조직이였던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은 12.12를 기점으로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1980년 4월 광주지역 대학가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민중운동 및 반(反)군부 세력들은 신군부의 집권으로 민주주의가 더욱 후퇴하고 억압될 것을 우려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1980년 5월 초,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집회,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광주에서는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연일 개최되었다. 그 당시 '신군부'는 시민에게 총을 겨눴다. 하지만 '연병하 경무관'은 총을 버렸다.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지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안병하 국장은 오로지 시민의 안전을 우선시 했다.

 

1980년 5월 6일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민족민주화 성회'를 8일 ~ 14일까지 개최한다고 선포했다. 안병하 국장은 경찰과 학생의 피해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해 총학생회장과 비밀협상을 추진했다고 한다.

 

경찰은 학생들의 정당한 시위를 보장하고 안전한 귀가를 약속했으며, 학생들은 과격시위를 자제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 대신 횃불을 들었고, 결국 안전하고 질서있게 마무리되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비상계엄 확대

 

그러나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를 선포하는 동시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한다. 대학 휴교령과 국회해산, 정치인 예비검속 등이 이어졌고, 5월 18일 광주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주요 대학은 점령당했고, 교내에 남아 있는 대학생들은 무조건 체포했다. 항의하는 학생들은 곤봉으로 내리쳤고, 군화발로 짓밟기도 했다.

 

이에 맞서 항의하는 학생, 시민들의 숫자는 급증했고, 계엄이 확대된다. 그리고 안병하 국장이 있는 전남의 경찰권도 신군부의 통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안병하 국장은 경찰 참모들에게 "시위대와 대처할 때는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평화적인 시위가 되도록 슬기롭게 대처하자"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특히 총기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안병하 국장의 조치로 당시 광주 시민들과 경찰들 간의 충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경찰이 비무장 상태로 계엄군에게 부상당한 시민들을 치료했고, 식사와 옷도 제공했다고 한다.

 

이런 경찰을 보고 감동한 시위대들은 박수를 보내고,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광주시민들은 "경찰은 적이 아니다!, 민주 경찰이다!"라는 구호도 외쳤다고 한다.

 

 

 

 

1980년 5월 20일 공수부대가 경찰 간부를 폭행한다. 시위대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주경찰서장'이 질질 끌려 가기도 했고, 전남도경은 과격한 시위 집압에 항의하다 폭행을 당해 머리가 터지는 일도 있었다.

 

전남도청이 시민군에 장악당하고 전투교육사령부에 최규하 대통령이 방문했다. 여기에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종환' 내무부장관, '소준열' 전교사령관, '안병하' 국장 등이 있었는데, 이희성은 막무가내로 안병하 국장을 쏘아붙였다.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 즉, 시민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그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안규하 국장은 "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희성은 "저런 사람이 전남 치안을 맡고 있는 경찰인가?"라며 소리쳤다.

 

참고로 이희성은 안병하 국장과 육사 8기 동기생이었다.

 

 

 

안병하, 진정한 경찰

 

1980년 5월 26일 안병하 국장은 신군부 명령에 거부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된다. 그리고 보안사령부로 연행했다. 8일간 불법 구금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처음에는 '부정축재 비리자'로 엮으려고 했으나 너무 깨끗해서 실패했다.

 

결국 강압에 의해 사표를 제출한 뒤 석방이 되었다. 안병하 국장은 고통속에서도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풀려난 뒤에도 치안본부에 대기하는데, 신군부의 눈치를 살피던 경찰 수뇌부들은 그를 돕지 않았고, 심지어 무능한 경찰로 비판하며 낙인을 찍었다.

 

1980년 6월 13일 집으로 귀가한다. 말문도 닫았고, '죽고 싶다'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담낭염, 고혈압, 당뇨, 신부전증까지 앓았고, 하루건너 피를 걸러내야 하는 중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8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1998년 10월 10일, 한 내과의원에서 혈액투석을 받다가 순직한다.

 

안병하 치안감은 진정한 대한민국의 경찰이자 진정한 공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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