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죽음, 호화로운 장례

 

우리가 매국노로 알고 있는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였다. 그는 을사늑약, 기유각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는데 협력하여 경술국치에 이르게 했다.

 

*이완용(李完用, 1858년 ~ 1926년),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다.

 

 

이완용의 창씨명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이며, 제국주의 일본에서의 작위는 '후작'이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내며,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內鮮一體)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대한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후작(候爵) - 화족 제도의 5등작에서 제2위에 해당되는 지위. 1947년에 폐지.

 

 


 

이완용 죽음, 호화로운 장례식

 

1926년 2월 13일 매일신보 '이완용 사망 기사'

 

이완용은 평소 기침과 폐렴, 그리고 흉통 등으로 고생했는데, 특히 겨울철에는 더욱 통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 의사들에게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으며, 치료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병은 낫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심해졌다. 

 

쇠약해져 가는 그의 몸상태와 달리 그의 재산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가 소유한 부동산은 무려 1억 3천만 평에 달했다고 한다. (참고로 서울의 면적이 약 1억 8천만 평이다)

 

그래서 그는 왕을 제외한 조선인 중 가장 부자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완용의 몸은 더욱 악화되어 기침은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됐고, 그는 졸도하여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지기에 이른다.

 

순종은 그가 오늘이 고비라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집으로 적포도주 한 상자를 보냈다. 하지만 이완용은 순종이 보낸 포도주를 입에 대 보지도 못하고, 옥인동 집에서 사망했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그의 아들인 '이병길'은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일본인 의학박사 2명과 조선인인 그의 주치의, 그리고 이윤용과 이항구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좌) 고종황제 장례 행렬 / (우) 이완용 관뚜껑

 

이완용의 장례식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합쳐 50명의 장례위원들의 의식 속, 1926년 2월 12일 치러졌다.

 

또한 사이토 총독 등 1300여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일본왕이 하사한 장례 깃발을 앞세운 호화로운 장례 행렬이 있었는데, 그 깃발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후작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 正二位大勳位候爵 牛峯李公之)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장례 행렬은 옥인동에서 광화문까지 이어졌으며, 그 행렬은 일본 순사들이 호위했다고 한다. 또한, 그 규모는 고종 황제의 장례 행렬을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굉장히 호화롭고 성대했다.

 

그는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다.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 및 방치되다가 1979년 직계 후손들에 의하여 화장되었다고 한다.

 

 


 

이완용 어록

 

경성일보 1926년 2월 19일

 

"조선 독립은 허망한 선동이다. 거짓 선동에 빠지지 마라"

 

"조선은 일본과 원래 한뿌리다. 양국은 흥망성쇠를 같이 할 것이다"

 

"독립에 대한 희망이 있어도 만세만 외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현실을 모르고 행동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이나 키워라"

 

"나를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내가 바른말을 하는데도 안 듣는 건 너희가 무지한 탓이다"

 

"진정하라. 만세운동도 한때다. 내 말 잘 듣고 후회할 짓 하지 마라"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이게 다 조선의 평화를 위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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