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선조와 광해군의 곤룡포

 

조선역사상 가장 비난을 많이 받고 있는 왕은 선조(1567~1608년)다.

 

백성을 버리고 몰래 도망치고, 조선의 성웅인 이순신마저 못살게 굴었던 쪼잔한 인물이다. 선조는 국가적 위기에서 올바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을뿐더러, 왕좌 유지에만 집착해 충성스러운 신하를 멀리하고, 자식마저 견제했다.

 

선조의 쪼잔함은 극에 달해, 아들 옷의 색깔마저 바꾸어 버린다.

 

원래 세자는 왕과 같이 붉은색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머리에 썼는데, 광해군은 세자가 되고, 청색의 곤룡포를 입는다.

 

 


 

전란에 아들을 떠밀어 넣다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오후 4시경, 부산 앞바다에 왜선이 나타났다.

 

배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군이 타고 있었다. 저항조차 받지 않고, 조선 땅에 상륙해 부산을 함락한다. 4월 28일에는 충주까지 치고 올라갔고, 점점 선조는 불안에 휩싸였다.

 

선조는 4월 3일 새벽, 자신의 아들인 17세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평양성으로 도망을 가버린다.

 

도망가기 전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백성들을 불러들였다. 그 많은 백성들의 발을 묶고, 왕은 이미 도주를 해서 한양은 지옥으로 변했다. 며칠 후 일본군은 힘 한번 쓰지 않고, 도성에 입성한다.

 

 


 

왜 같은 옷을 입는가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광해군

 

광해군은 17세에 불과했지만 분조를 책임지며, 의병 모집을 진두지휘하며 직접 전쟁터로 나아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했다.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 선조와 대비되면서 백성들은 광해군을 지지했다.

 

이에 선조는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민심도 광해군에게, 게다가 굳건한 지지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매우 심했고, 걸핏하면 태클을 걸며 힘들게 했다. 전란인데.. 선조를 상왕으로 올리고, 광해군을 국왕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선조 / 광해군

 

어쨌든 광해군이 총명하고 잘하니까 선조는 괜한 트집을 잡는데, 바로 옷의 색깔이다.

 

자신은 조선의 왕이라서 붉은색 곤룡포를 입는데, 광해군인 세자가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왕 행세를 하는 것 같아 그 꼴을 보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조는 예법을 담당했던 예조에게 문제를 삼았다. 하지만 예조는 "그런 법도는 없다"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태클을 걸었다.

 

결국, 선조는 과거 기록을 뒤져 명종(1545~1567년) 대에 '순회세자'가 검은 옷을 입었던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세자는 검은색 옷을 공식석상에서 입을 수 있다"라고 못 박으며 "세자가 붉은색 옷을 입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렇게 광해군 때부터 세자의 곤룡포 색이 남색 또는 검은색으로 바뀌고, 조선 후기에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 이영'이 붉은색이 아닌 남색 곤룡포를 입었다고 한다.

 

 


 

 그릇된 부정(父情)으로..

 

 

선조는 그릇된 부정(父情)으로 예법마저 바꿔버린다.

 

원래 곤룡포의 색에는 서열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짜증나지만, 황제를 의미하는 황색은 중국 황제가 입었고, 조선 왕조는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붉은색을 입었다.

 

여기에 예법에 따라 세자는 왕과 같이 붉은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머리에 썼다고 한다.

 

왕과 세자는 곤룡포가 완전히 같지는 않다. 흉배에 놓인 용의 발톱의 개수로 차이를 뒀다고 한다.

 

왕- 오조룡(발톱수가 5개인 용)

왕세자 - 사조룡(발톱수가 4개인 용)

왕세손 - 삼조룡(발톱수가 3개인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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