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항상 한국을 이용했다. 한일관계가 좋았던 이유는 다 일본에 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이용해 경제 회복뿐만 아니라, 소련의 공산화로부터 일본을 지켰다.
요시다 시게루 前 일본 총리 曰 : "한국 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 이제 일본은 살았다. 하늘이 일본을 돕는다." 고 기뻐하며 만세삼창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소 다로 前 총무성장관 : "운 좋게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일본 경제 재건을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영국 옥스퍼드 강연에서.
일본은 뭐 때문에 한국전쟁을 저렇게 언급할까?
왜 선물일까?
'요시다 시게루'가 한국전쟁을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한 이유는 2가지로 볼 수 있다.
1번째 - 냉전의 격전지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서 발생했기 때문
2번째 - 한반도에서 냉전이 발생하면 가까운 일본에게는 득
원래 냉전의 격전지는 일본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 이유가 소련이 일본을 달라고 미국에 요구했었고, 일본 4분할 계획까지 있었다고 하니, 일본은 매우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많은 계획과 준비를 했다.
한반도 분단은 일본의 치밀한 전술??
한반도 분단이 일본의 치밀한 '항복 전술'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이 있다.
<유라시아의 쇠퇴: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략(Eurasian Eclipse:Japan's End Game in World War ll)> 논문에 따르면 일본 군국주의자들 내부에서 '38선 분할안'을 툭하면 들먹거렸다고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이 또한, 한반도를 이용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때는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거의 확실했던 1945년 초라고 한다. 이런 흐름에 결정적인 지침을 제공한 배후 인물은 해군 소장 '다카키 소키치'였다고 한다.
논문에 의하면, 다카키 소키치는 일본의 지도적 전략가였으며 1939년부터 일본의 세계 전략으로 독일·이탈리아·일본과 소련을 묶어 영국·미국 동맹에 대항하는 방안을 입안해 추진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1943년 이후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 조기 종결을 주장했다. 겉으로는 '친 영·미파 부전론자'로 행세했지만 뒤로는 패전 이후 예상되는 미국의 영향을 약화하기 위해 소련과 손잡는 전략을 비밀리에 추구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13일 다카키 소키치가 완성한 중간보고 초안에 보면 '일본이 전쟁에서 질 때 지더라도, 동북아에서 일본이 누렸던 기득권을 송두리째 미국에 넘겨줘야 한다.
다만, 미국이 일본을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소련과 손잡아야 한다. 일본의 '이중 플레이'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일본 항복 선언이 늦어진 이유
일본 측 최고 전쟁 지휘부 '대본영'은 이미 1945년 5월이면 소련이 참전해 만주, 한반도 북부로 진격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소련이 공격을 위해 극동 지역에서 군비를 증강한다는 징후를 1945년 2월에 포착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도 1945년 가을까지는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예비적 군사 행동으로 한반도 남부에 진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본은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라고 지시하고, 미국의 한반도 진출을 저지하라는 등 각각 다른 대응을 명령했다. 즉, 한반도 분단을 일본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8일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 소련이 만주국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고, 한반도에 아무런 저항 없이 내려왔다. 그 이유가 일본이 '소극대응'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 주둔군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다고 한다.
미국은 소련군은 남하를 막기 위해 서둘러 38선을 확정했다.
일본은 왜?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서 항복을 했는가?
1. 군부 강경파가 최후의 일전을 외치며 항복을 반대
2. 냉전의 격전지를 한반도로 돌리기 위해
구체적인 물증이나 자료는 없지만, 그 당시 원폭이 떨어지던 날, 기밀문서 폐기 작업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의 군수공장이 다시 가동
일본의 패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동시에 일본의 국가 주권은 상실됐고, 연합국의 점령지로 전락했다. 파산이나 다름없었다.
군인들은 모두 무장해제 당하고, 6백만에 이르던 군인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일본의 모든 군수공장은 멈췄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지옥으로 변했고, 일본 거리에는 일자리를 찾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사람들도 줄을 이었다.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미군은 남한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연합군 점령지인 일본을 기지로 이용하면서 일본 전체가 보급부대로 변신한다. 일본이 전범국이었지만 이 기회로 미국을 도와 다시 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일본 도쿄에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 맥아더 장군이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이때 일본의 군수공장들은 다시 활발하게 가동되기 시작한다.
미국은 자신들의 돈을 투자해 군수공장을 짓고, 많은 투자를 했다. 그때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의 대기업들이 속속 탄생했다. 그렇게 일본 국내에는 일자리가 많아지게 된다.
미군에 고용된 일본인들도 3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도쿄 시내에는 처음으로 슈퍼마켓이 탄생하고,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조달한 물자 : 약 16억 달러
무기, 군수품 : 약 24억 달러
전쟁 특수 : 약 62억 달러
※ 전쟁 특수 : 전쟁 시 군용품, 무기, 식량, 의약품 등 / 군인들이 전장에서 사용하는 필수품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발생하는 특별한 수요를 말한다.
또, 전쟁을 치르던 군인들은 휴식을 일본에 와서 했고, 그 당시 일본에 벼락부자들이 많이 탄생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주 에뮤 전쟁(Emu War), 조류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0) | 2020.07.12 |
---|---|
분단국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될 수도 있었다 (0) | 2020.07.10 |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富)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0) | 2020.07.08 |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육식을 명했다. (0) | 2020.07.06 |
곤룡포 색이 바뀐이유, 선조의 쪼잔함과 뒤끝 (0) | 2020.06.30 |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