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13년 4월 17일, 기록을 보면 성종이 일본 사신에게 '후추 씨'를 구해 보내라고 요청한 기록이 있다.
일본 사신은 남만(옛날, 중국 남방의 제민족을 일컫던 말), 자바(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종자를 얻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지들도 후추를 생산하지 않았고, 수입해서 썼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구국(오키나와)이 남만과 자바에서 들여오면, 그 후추를 또 일본에서 가져가고 그랬던거 같다.
하지만 성종은 일본 사신에게 유구국에 부탁을 해서 가져오라고 부탁한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사신, 사자, 대마도주, 상인 등에게 후추 씨를 구해달라고 했다.
일본 상인에게는 후추 씨를 가져오면 팔만대장경과 교환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성종이 후추를 언급했던 기록만 42번이다.
성종은 왜 그렇게 까지 후추 씨를 구해, 후추재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조선, 성종 때의 후추
성종 때 조선은 15세기, 유럽에서는 항해기술이 발달해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었다.
대항해 시대는 유럽인들이 후추에 미쳐서 일어난 일이다.
유럽에는 후추가 나지 않아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 왔다. 십자군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인도에서 후추를 구해왔다. 항해사 '바스쿠 다가마'는 후추 무역으로 인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향신료 무역을 하겠다고 나서는 인간들이 많아졌고, 많은 인간들이 후추를 찾아 바다로 뛰어들었다.
지금은 음식의 잡내를 없애고, 맛을 돋우기 위해 요리에 후추를 뿌리는 것은 아주~ 아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럽인들은 후추와 향신료 때문에 전쟁도 일으키고, 정복도 하고, 별 짓을 다 했다.
후추나 향신료가 매우, 매우 귀했다.
후추의 원산지는 인도였으며, 일본과 중국 역시 모두 수입을 했었고, 성종이 부탁해도 후추 씨를 구하기는 그들도 또한 어려웠다.
또, 인도에서는 후추를 종자 상태로 팔지 않았고, 모든 후추를 삶아서 팔았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씨앗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만약 성종이 씨앗을 구했다 하더라도, 조선의 풍토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후추재배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종이 이나라 저나라 사신과 상인들에게 후추 씨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얼마나 했는지, 주변 국가들은 '조선의 왕은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후추가 귀했기 때문에 성종의 취향이 사치스럽다고 오해받기도 했다.
또, 주변국에서 후추 선물이 엄청나게 들어왔다. 성종은 씨앗을 원했는데, 씨앗이 아닌 삶아진 후추가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그 많은 후추들은 예쁜 주머니에 담아 공을 세운 자에게 상으로 내리고, 신하들에게 선물을 했다고 한다.
성종이 후추재배를 그토록 원했던 이유
성종이 후추 씨앗을 조선에 들이려고 그렇게 애쓴 이유는 국가 재정과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1. 후추재배해 중개무역으로 큰돈을 벌어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성종은 후추를 재배해 소비량이 큰 중국에 후추를 직접 판매하려고 했다. 그 당시에 향신료 무역은 이익이 장난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을 바다로 뛰어들게 했으니 상상 이상이다.
2. '후추를 달인 물'이 일사병에 좋다고 하여 백성들에게 약으로 쓰도록 나눠주려고 했다.
후추는 음식 맛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한의학에서 귀한 약재로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냉방시설이 없고,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불볕더위에 쓰러지는 백성들이 많았다.
일사병에 앓아누웠을 때, '후추를 달인 물'이 좋다고 한다. 성종은 값비싼 후추를 백성들이 구할 수 없었기에 후추재배를 자체적으로 재배해 나눠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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