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이 어떻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는지는 모두가 잘 알 것이다.

 

교역을 하러 갔다가 뭔가 뒤틀리면 무력을 행사하고, 그다음에는 불평등조약을 꺼내며 식민지로 전락시킨다.

 

대영제국은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이며, 인류 최초의 자본국가의 힘의 수준은 이미 모든 나라를 능가했다.

 

그들은 막강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들이박지 않았고, 전략을 썼다.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고, 식민지의 우두머리 뒤에서 조종했다. 아주 효율적으로 관리를 했던 것이다.

 

아편전쟁 역시 일어난 이유가 있다.

 

 


 

청나라와 교역

 

 

그 당시 청나라(중국)는 매우 큰 시장이었다. 인구도 많고, 땅도 넓고, 자원도 풍부했다.

 

이런 청나라를 세계열강들이 가만히 나둘리가 없었다. 대영제국은 슬그머니 청나라로 간다.

 

대영제국은 신사라서 그런지, 초면부터 먹고 싶다고 들이박지는 않는다.

 

청나라에게 교역을 하자고 제안한다. 대영제국의 물품은 면직물이었다.

 

그런데, 대영제국의 면직물은 청나라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미 비단, 솜털 옷, 삼베 등, 면직물에 있어서는 최고였다. 황제가 입고 있는 옷을 보면 놀랐을 것이다.

 

이렇게 대영제국이 짜증나 있을 때, 1662년 찰스 2세(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제3대 왕)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결혼예물로 '차'를 가져왔다. 포르투갈이 대영제국을 물 먹인 것이다. 그렇게 캐서린 왕비는 는 대영제국에 차를 보급시킨다.

 

차는 왕실과 상류사회에 알려지고, 즐겨 마시는 수는 더욱 늘어났다.

 

문제는 18세기 중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중산층이 차를 즐기게 되자 대영제국은 최대의 차 수입국이 된다. 신흥 부르주아인 공장주들은 공장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티 브레이크'를 만든다. 휴식시간에 노동자들에게 차를 제공했다고 한다.

 

 


 

청나라와 교역했다가 손해

 

 

대영제국은 1689년 청나라 차를 처음 수입했고, 포르투갈의 캐서린 덕분에 1837년에는 차가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전체 품목의 90%가 가 넘어버린다.

 

대영제국은 고민에 빠진다. 차 수입으로 발생하는 무역 역조를 해결해야 했다. 까딱 잘못하면 제국이 휘청거릴 수 있었다.

 

그 해결책으로 대영제국은 마약을 선택한다. 그 마약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편'이다.

 

대영제국은 청나라에 아편을 몰래 팔기 시작한다.

 

 


 

아편 청나라를 병들게 하다

 

 

청나라에서 아편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하층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839년 당시, 청나라의 아편 문제는 상상 초월이었다. 동아병부(동방의 병든 남자)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청나라의 경제도 심각했다. 대영제국에 차를 팔아 대량의 은을 얻고 있었는데, 대영제국이 은 대신 인도산 아편으로 차의 대금을 치르는 정책으로 바꾼다.

 

청나라에 아편 중독자들은 점점 늘어났고, 수요도 점점 늘어갔다. 결국 청나라가 아편 때문에 은을 영국에 지불하는 형태로 바뀌어버린다.

 

청나라는 더 이상 아편 문제를 미룰 수 없었고, '임칙서'를 1838년 12월 31일 흠차대신에 임명한다. 아편 근절 특명을 받고, 광둥성에 파견된다.

 

*흠차대신 - 청나라 때, 임시관직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고, 마약상과 밀거래 업자를 홍콩으로 쫓아냈다.

 

또한 임칙서가 압수한 1426톤의 아편을 전량 폐기해버린다.

 

이때 아편을 버리는 것을 본 영국인 '엘리엇'은 눈이 뒤집어진다. 바로 빅토리 여왕에게 일러바친다.

 

'영국인 사유재산(아편) 보호를 위해 청나라와 전쟁이 필요합니다'

 

임칙서는 모든 정보를 모아 아편 문제를 뿌리까지 뽑아내려고 했다.

 

그 와중에 영국인과 마찰도 많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영국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무역조 차 금지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대영제국, 도리(道理) 저버리다.

'아편전쟁'

 

 

전쟁을 피하기 힘들다고 여긴 임칙서는 전쟁 준비를 했지만, 대영제국이 전력으로 공격한다면 청나라가 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친필로 외교문서를 작성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냈다.

 

"(빅토리아) 폐하의 상인들은 폐하의 나라에서 불법인 독극물인 아편을 청나라에 들여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이를 허락하셨을 리 없다고 보며, 만약에 허락하셨다면 군주로서 취하실 행동이 아니라 봅니다. 청나라는 대영제국과 정상적인 무역을 그만둘 뜻이 전혀 없으며,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아편을 제외한 무역에 최혜국대우를 제안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은 "수요가 있으니 공급한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임칙서의 서한이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영제국 정부가 격론 끝에 청나라와의 전쟁을 결의한 다음이었다. 만약 일찍 도착했어도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영제국은 청나라와의 무역관계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전쟁 계획을 미리 했었다.

 

대영제국도 아편 밀무역의 부도덕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차' 수입량은 계속 늘었다. 그렇다고 청나라에 수출할 품목도 없었다. 때문에 인도에서 1818년부터 대량 제조한 아편 밀수출 밖에 답이 없었다. 결국 대영제국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마약을 동원하고, 원정군 파견까지 승인을 한다.

 

그리고 웃긴 것은 대영제국에서 아편은 불법이 아니었다.

 

1840년 6월 4000명의 병사를 태운 47척의 영국 함대가 광동을 습격한다. 이것이 아편전쟁이다.

 

대영제국의 의도된 전쟁에 난징조약이 체결되었고, 홍콩을 할양,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하며, 거액의 배상금 지불, 영국인 활동의 자유 보장 등에 합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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