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윤두수는 1533 ~ 1601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치인이자 성리학자, 작가, 시인으로 서인의 일원이다.

 

대사헌 때 당쟁 과정에서 회령으로 유배를 갔으나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우의정, 약방 도제조, 좌의정으로 연달아 승진하였고, 의정부영의정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리고 원균의 인척이며, 윤보선 전 대통령의 선조이기도 하다. 

 

윤두수는 TV 드라마에서 다소 부정적인 인물로 나오기도 했지만 사실 선조에게 충언도 많이 하고,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선조의 말고삐를 잡은 장본인이다.

 

 


 

임진왜란 당시 윤두수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다. 일본의 장수들은 빠른 시간 내에 도성까지 진격했고, 선조를 잡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력하였다. 일부에서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윤두수는 조선의 힘만으로도 능히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를 주장했다.

 

그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는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고니시는 임진강 방어선을 손쉽게 통과하였고, 서울과 개성을 연달아 점령했다.

 

이미 선조는 평양으로 도망가있는 상태였고, 또다시 선조를 잡기 위해 일본은 평양까지 진격했다. 조선은 평양을 사수하려 애썼으나 실패하였고, 선조는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윤두수가 평양성 사수를 끝까지 주장했지만 평양성 전투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 요청을 한다.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윤두수는 급하게 쫓아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전하 어찌 필부의 경솔한 행동을 하십니까"라며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으며 망명 철회를 요청했다.

 

뒤이어 함흥피난론이 거론되었으나 윤두수는 그것도 반대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선조는 의주로 갔고, 함흥은 곧 함락되었다. 윤두수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국경을 넘어 랴오둥으로 피난을 준비했고, 윤두수는 상소를 올리고 직접 그것을 막았다. 

 

 


 

윤두수와 이순신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윤두수가 비교적 부정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아마도 이순신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윤두수는 원균의 인척으로, 원균과 이순신이 갈등할 때 원균의 손을 들어주었고, 원균은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며 적극적으로 그를 후원하였다.

 

1594년 9월 윤두수는 군사를 이끌고 거제에 있는 왜적을 몰살시키려다가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으나 1595년 초 판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597년 일본은 명나라와의 조약을 깨고 조선을 재침공하였는데,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 해 1월 27일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위급할 때는 장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파직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한양으로 압송된 이순신을 심문하여 고문을 하였다.

 

안타깝게도 윤두수와 이순신은 둘 다 충신이었으나 좋은 인연으로 만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윤두수

 

이미지 출처 - KBS드라마 징비록

 

윤두수는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류성룡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고, 이듬에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리고 그 해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1599년에 의정부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동인들의 반대로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에는 부원군으로 정사에 출입했고, 1601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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