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관동) · 시즈오카 · 야마나시 지방에서 진도 7, 9급의 초강력 대지진이 발생했다.

 

점심시간 가정에서 불을 피우고 있던 시간대라서 지진이 오자 곧바로 대화재로 이어졌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5만 가구가 불탔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이 총 14만 명, 이재민이 340만 명에 달했다. 거의 관동 지역 일대가 궤멸되다시피 한 피해를 입었었다.

 

야마모토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고,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

 

이때 일본 자국민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을 이용해 괴상한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트리기 시작했고,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우물에 조선인이 독을 넣었다'

 

유언비어는 경찰 조직의 비상 연락망을 통해 확대되면서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관헌들과 함께 조선인들을 무조건 체포하고 구타했으며 나아가 학살까지 자행한다.

 

 


 

감정을 이용한 일본 정부

 

 

1920년대 전반 일본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세계 곳곳에서 코민테른의 활동이 늘어나며 동아시아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었고, 공산국가냐 민주국가냐 그것이 문제였다. 식민지였던 한국과 중국의 민족해방운동도 격화되기 시작했기에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 내부에서도 공황으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그리고 부락해방운동까지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서 일본은 '과격사회운동취제법' 제정을 시도하며,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을 하기 위해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 '관동 대지진'이다.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국민의 혼란을 이용해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부추겼다.

 

1923년 9월 1일 오후, 경시청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 준비를 했다. 내무 대신 미즈노(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경시총감 아카이케(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은 그날 밤 도쿄 시내를 돌았다.

 

다음 날, 도쿄와 가나가와현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에게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폭동'의 전문을 준비해 9월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에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 장관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 타이완총독부에도 알렸다.

 

전문 내용 - 동경 부근의 진재(震災)를 이용해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령(不逞 : 불평불만이 많아 멋대로 함)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여, 현재 도쿄 시내에는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다.

 

도쿄에서는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였으므로 각지에 있어서도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가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는 엄밀한 단속을 가해 주기 바란다.

 

소문은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9월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 5일에는 계엄 사령부에 의해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 극비리에 결정된다.

 

협정 내용 - ① 조선인의 폭행 또는 폭행하려고 한 사실을 적극 수사해 긍정적으로 처리할 것. ② 풍설을 철저히 조사해 이를 사실화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 ③ 해외에는 특히 적화(赤化) 일본인 및 적화 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데, 노력할 것.

 

9월 7일에는 두 번이나 유산된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을 부활시킨 치안유지령을 긴급 칙령으로 공포하고, 치안을 해치는 사항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징역 10년의 중형에 처하게 한다.

 

 


 

결국, 조선인 학살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와 경찰, 그리고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에 의해 6천 여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도쿄 752명, 가나가와현 1,052명, 사이타마현 239명, 지바현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학살이 가장 먼저 일어난 도쿄와 가나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 사이타마현 등지에서는 민족배외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자경단에 의해 행해졌다.

 

특히 자경단은 죽창과 일본도, 곤봉, 철봉 등 다양한 무기를 들고 도망치는 조선인들을 붙잡아 무차별로 학살했다. 경무서(경찰서)로 도망친 조선인들까지 쫒아 들어와 학살했지만 일본 관헌은 방조했다.

 

"일본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조선인 83명을 한꺼번에 죽였어요. 임신한 부인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 부인의 배를 가르고, 어린 아기까지 찔러 죽이는 걸 봤습니다" <관동대지진 증언 기록>

 

 


 

15엔의 비밀

 

 

일본인과 조선인은 생김새가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가려내기 위해 15엔을 이용했는데, 15엔은 일본 발음으로 '쥬고엔'이라고 발음한다. 여기서 '쥬'는 탁음이라고 해서 발음이 독특한데, 조선인들은 이 발음을 잘하지 못해서 '주고엔' 또는 '추고엔'이라고 발음했다.

 

일본은 15엔 발음을 못하는 사람을 골라내서 학살하였고, 이 과정에서 탁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진짜 일본인들도 상당수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불안하고 슬픈 감정을 이용하는 정치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것 같다.

 

일본은 자국의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화시키고 정권유지를 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을 없애야 했고, 그 계획에 앞세워진 게 조선인이었던 것 같다.

 

이 사례 또한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한 정치가 아닐까?

 

 


 

 

'공포'를 이용한 정치인들, 공포정치가 가능한 이유

정치는 어떻게 보면 눈속임이자, show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정치인들은 뭘 꾸미거나 만들거나 온갖 show를 한다. 전쟁, 테러, 질병 등 공포는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1923년 11월 8일, 3천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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