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9년에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 있었다. 고려 우왕이 재위하고, 14년 동안 왜구가 378회나 침입을 했다. 그 당시 왜구의 소굴은 대마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384년 우왕이 이렇게 말했다. "도통사 최영은 전함을 건조해 해전에 대비하고 화포까지 장착해 주도면밀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경이 해도원수로 있는 요즈음은 왜구가 고을들을 침략해도 소탕하지 못하니 이는 실로 경의 죄다"라고 책망했다.
그러자 해도원수 '정지(고려시대 무신)'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1387년 글을 올려 스스로 대마도 정벌을 자청했지만 무산되었다. 하지만 준비는 계속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왜구의 약탈과 방화, 살육으로 고려는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1389년 2월 '박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사 1만 명과 전함 100척을 징발해 대마도로 떠난다.
대마도 정벌, 박위 장군
대마도로 도착한 '박위 장군'과 고려군은 신속하게 이동해 왜구가 저항할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공격을 시작했다. 군하들은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는 왜구의 전선 300척을 소각했고, 육지에 상륙했다.
이미 왜구의 전선들은 불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왜구들은 사기가 떨어져 전선을 이탈하고, 성안의 깊숙한 산속으로 도망쳤다. 결국 그들은 고려군과 정면 대결을 하지 못했고, 반격할 기회를 놓쳤다.
왜군이 도망갔기 때문에 고려군은 실제로 왜구를 포획하거나 살상하는 전공은 세우지 못했다.
정벌 결과 고려군은 왜구의 전선 300여 척을 불태웠고, 전초기지인 대마도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포로로 잡혀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했다.
'박위 장군'은 이렇게 한반도 사상 첫 번째 대마도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이후 일본
고려가 대마도를 정벌했다는 소식은 류큐국(오키나와)까지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류큐국의 증산왕은 스스로 고려의 신하국을 청하였다.
그리고 특산물인 유황, 후추 등을 조공했으며, 이는 조선 개국 이후에도 200년 넘게 이어졌다.
류큐국 뿐만아니라 그동안 왜구가 고려를 침략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해왔던 일본 서북지방과 규슈지방 토착 봉건영주들은 자세를 낮추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1390년 5월 규슈 절도사는 고려에 조공을 바쳤고, 1391년 규슈에서 고려인 남녀 포로 68명을 돌려보내는 등의 성과들을 거두었다.
아쉬운 점은 대마도 정벌로 왜구들의 침입은 줄었으나, 왜구들 중에는 고려인도 있었기 때문에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박위 장군
'박위'장군은 상주,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을 역임하고, 합포 수령을 세 번 역임하는 등 다양한 지방 수령으로 오랜 기간 동안 전공을 세워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대단하였다.
'박위 장군'은 상주 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을 안동까지 무사히 피난시켰고,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적을 대파했다.
김해 부사로 있을 때는 낙동강을 통해 밀양으로 공격해오는 왜선 50척과 뒤따르는 후속부대들을 군선 30척으로 수륙 합동 작전을 펼쳐 거의 전멸시켰다고 한다.
정몽주의 수필에 따르면 '박위'는 행정력이 탁월하고, 왜구에 의한 폐허와 토지 복구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잘 처리하는 유능한 장군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성계 <태조실록> 태조 3년 1394 갑술 1월 21일(신유)에는 '박위와 같은 인재는 쉽사리 얻을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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