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척화비

 

구미에도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봤다. 정말 뜬금없이 도로 옆에 작은 안내판이 있고, 그 옆으로 작은 길(돌계단)이 있었다. 주변엔 공업단지가 있고, 처음 가보면 찾기 힘들다.

 

겨우 찾아서 들어가보니 그냥 돌하나가 있었다. 돌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래되서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척화비는 교과서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비석으로만 봐서 그런 모습을 상상하고 들어갔는데, 여기는 그냥 돌덩이 같았다.

 

 


 

척화비란?

 

병인양요 / 흥선대원군

 

국,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으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고, 무력도발이나 시위를 자행하는 것을 본 흥선대원군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인해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시행했다.

 

여기에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은 조선왕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외국과의 수교 및 통상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것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1871년 서울과 전국의 요충지 200여 곳에 화강암으로 만든 척화비를 세웠다.

 

그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명성황후에 의해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에 납치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사라지자 다른나라와의 통상이 이루어지고, 척화비 또한 고종의 명으로 12년 만에 거의 철거되거나 묻혀버렸다.

 

서울에 세운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납치된 후 종로 보신각 부근에 묻었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길 당시 발견되어 경복궁에 진열되었고, 이 외에도 전국 각지에 30여개가 남아있다. 구미 척화비도 그 중 하나이다.

 

 


 

구미 척화비[龜尾 斥和碑]

 

구미 척화비 전경

 

구미 척화비는 크기가 가로 175cm, 세로 186cm인 비석으로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되어있다.

 

구미 척화비는 유일하게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쪼아서 새겼다. 지금은 도로방향이 아닌 옆으로 보고 있는데, 척화비를 세울 당시에는 길이 바위 앞으로 나 있었다고 한다. 이 길이 칠곡, 가상, 왜관에 사는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구미 척화비(입구)

 

다른 곳에 있는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납치된 후 철거되었는데, 구미 척화비는 따로 다듬어서 세운 비석이 아니라 자연석 그대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무거워서 철거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한 석공이 바위로 상석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민들이 만류하여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구미 척화비에 쓰인 글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뜻이다.

 

 


 

구미 척화비(내려가는 길)

 

교과서에서나 보던 척화비를 실제로 보니 너무 신기했다. 지금 프랑스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고, 여행하고, 심지어 국제결혼까지 하는 것을 흥선대원군이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어쨌든 문화재인데 표지판이라던가 이정표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다. 찾아보고 가는 사람이 아니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칠 것 같다.

 

그래도 관리는 잘 되어 있었다. 구미에 갈일이 있다면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에 주차장은 따로 없고, 그 옆에 천해사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곳에 주차하면 될 것 같다.

 

 

구미 척화비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 산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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