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낙산리 고분군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에는 가야와 신라의 구덩식돌덧널무덤·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 있다.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이란? - 직사각형에 가까운 묘광을 파고, 그 구덩이 벽을 따라 안쪽에 돌을 쌓아서 네 벽을 설치한 다음 관과 부장품을 안치한 후 천장을 만들고 그 귀에 봉분을 구축한 무덤.

덧널무덤(木槨墓)이란? - 직사각형에 가까운 묘광을 파서 목곽(木槨)을 설치하고, 그 안에 관과 부장품을 안치하는 무덤.

 

 

구미시 일대에는 낙동강을 끼고 동·서 양안에 많은 고분군들이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강의 동쪽편인 해평면(海平面) 일대가 고분군 분포의 중심지라고 한다.

 

1990년 10월 31일에 사적 제336호로 지정되었고, 지정 면적은 229.245㎡이며 구미시 일대의 고분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동측의 냉산(해발 691.1m)에서 서측으로 낙동강을 향해 뻗은 구릉들 가운데 하나의 말단부 가까이로 이 구릉의 말미는 낙동강과 접해 있다.

 

낙산동 고분군은 3개의 군집으로 나누어진다.

 

 

 

구미시 대규모 고분군

 

25번 국도의 서편에 낙동강을 향해 말발굽 모양으로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는 것을 월파정산(月波亭山) 고분군.

 

그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편의 북서에서 동남으로 길게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고 있는 것을 정묘산(鄭墓山) 고분군.

 

정묘산 고분군과 작은 계곡을 두고 북쪽에 남북으로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는 것을 불로산(不老山) 고분군.

 

월파정산에서 확인되는 봉토분은 모두 81기로 대부분 원형의 단독분이나 표형분도 확인이 되었다고 한다.

 

말발굽 모양의 능선 상부를 따라서는 대형분이, 능선의 사면을 따라서는 소형분들이 배치되어 있다.

 

봉토의 크기는 대형분은 직경, 높이가 15x4m 정도이고, 대부분은 10x2m 내외이다. 특히 작은 것은 5x0.3m 내외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고 한다.

 

 


 

구미 낙산리 고분군(龜尾 洛山里 古墳群)

 

 

1915년 일제강점기에 흑판승미(黑板勝美)에 의하여 하나의 봉토분에 대한 시굴조사가 시행되었었다. 그리고 1917년 조선고적조사위원회는 구미지역 고분군의 분포를 조사하면서 그중 해평면 낙산동 28호분과 105호분을 발굴 조사하고 간단한 보고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 흑판승미(黑板勝美) - 구로이타 가쓰미, 일본의 고고학자 1919년 도쿄대학 교수가 되어 고문서학 강의를 맡음.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고분은 높이 9m의 대형분으로 그 내부는 길이 12m의 장방형 구덩식돌덧널무덤이 남-북 장측으로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돌덧널의 내부에는 남과 북에 각각 1인을 매장하여 2인을 합장하였고 여기에서는 약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아쉽게도 정확한 보고가 없어 조사 내용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합장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고분은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으로 추정된다.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이란? - 가족 구성원이 숨을 거둘 때마다 추가로 안치하는 추장(追葬)무덤.

 

 

 

 

해방 이후 구미지역의 고분군에 대한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많은 고분군들이 도굴되고 훼손되었으나, 1987년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선산지역 고분군의 분포가 재조사되고 낙산동 일대 고분군의 두 지점이 발굴 조사되었다.

 

고분군의 북쪽 주변이 택지조성지구로 지정되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이때에는 봉토가 남아 있지 않은 20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들은 구덩식돌덧널무덤 5기, 독널무덤(甕棺墓) 1기, 덧널무덤 12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2기 등으로 분류된다. 

 

독널무덤(甕棺墓)이란? -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독(甕)을 사용하여 주검(屍身)이나 뼈를 묻는 무덤양식.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 중의 하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이란? - 땅 위 또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덧널을 넣은 뒤, 그 위를 돌로 덮고 다시 흙을 씌워 만든 무덤.

 

 

덧널무덤 가운데는 돌을 깔아 바닥을 마련한 것이 있었고, 돌덧널 가운데는 주부곽식(主副槨式) 1기도 있었다.

 

출토유물은 굽다리접시(高杯), 손잡이잔, 항아리, 화로모양토기, 바리모양그릇받침 등의 토기류와 쇠손칼(鐵刀子), 쇠화살촉(鐵鏃),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등의 철기류가 있다.

 

또. 1989년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6기의 고분을 발굴 조사되었는데, 조사된 고분들의 봉토는 대부분 단일원분(單一圓墳)이나 표형분(瓢形墳, 38호분)과 다곽식의 다장분(多葬墳, 37호분)도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가는귀고리(金製細環耳), 유리목걸이(琉璃頸飾)등의 장신구류, 발걸이(鐙子), 띠고리, 십자형식금구(十字型飾金) 등의 철제마구류, 쇠도끼(鐵斧) 등의 철제농공구류와 다종 다양한 토기류가 있었다.

 

낙산동 고분군 전체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들은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하여도 205기에 달하고 있는데 봉토가 유실되거나 고분의 존재가 그러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훨씬 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구가 도굴이 심하여 유물의 내용이나 부장양상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일종의 토기제사유구로서 원형의 둘레돌 외곽에 소형토기부장구덩이를 마련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출토된 유물은 극소한 편으로, 등잔형토기와 같은 이형토기를 포함한 토기류 외에 특별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된 토기의 양식으로 보아 6기의 고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대에 축조된 듯하다고 한다.

 

토기 양식은 낙동강 동안양식토기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고, 경주지역이나 가까운 대구, 칠곡, 의성 등지와는 미세한 기형의 차이가 관찰되어 구미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있는 고분들의 크기는 낙동강을 따라 좌우에 분포한 지역별 고총군들과 비견되는 것으로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구미지역에 존재했던 정치집단의 최고 지배자들로 판단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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