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호는 율곡(栗谷)이다.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士林)이다. 퇴계 이황과는 35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성리학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 때문에 많은 토론을 했고, 서로 경쟁하며 학문적으로 서로 보완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사림(士林) - 성리학을 숭상하며 훈구파와 대립했던 조선의 지배층.
퇴계 이황이 새로운 시대 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 이이는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는 재혼 문제로 자녀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살아 있을 때 이원수에게 공자, 증자, 주희의 고사를 들어가며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그 말을 무시하고 어린 주막집 여자 권씨를 첩으로 삼았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당부를 무시하고 서모(庶母) 자격으로 권씨를 집으로 들였다.
이러한 가정의 불화로 인해 율곡 이이는 성리학 공부를 중단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율곡 이이, 승려생활
율곡 이이는 1554년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석담'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율곡 이이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행동은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
불교는 늘 유교만 공부했던 율곡 이이에게 색다른 학문으로서의 흥미를 느끼게 했다. 불교서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율곡 이이는 공부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연구도 했으며, 불도도 닦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가 수행하는 중에는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생불(生佛) - 살아 있는 부처
그리고 율곡 이이는 승려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고,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여 1년 만에 내려와 환속한다.
* 환속(還俗) - 불교에서 출가했던 승려가 다시 재가생활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
율곡 이이는 승려생활을 마치고, 주기론을 말하며 '연비어약'이라는 시를 남겼다.
언비어약(鳶飛魚躍)
언비어약상하동(鳶飛魚躍上下同)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매 한 가지
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
이는 색도 아니요, 또한 공도 아니라네
등한일소간신세(等閑一笑看身世)
실업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
독립사양만목중(獨立斜陽萬木中)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홀로 서 있었네.
'솔개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헤엄치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고 조화스러운 것. 만물이 저마다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전체적으로 천지의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법도라는 의미'
1555년 율곡 이이는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을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자경문 自警文>을 집필하였다.
한때, 승려로 있었던 율곡 이이는 동인과 남인에 의해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가 죽은 지 2백 년이 지난 뒤에도 근기남인의 지도자 허목, 윤휴, 윤선도는 그를 학자의 탈을 쓴 스님이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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