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 충신 불사이군

 

박익(朴翊, 1332년 ~ 1398년)은 고려의 문신으로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두문동칠십이인)의 한 사람이다.

 

*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두문동칠십이인) -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遺臣)등을 가리킨다.

 

 

본관은 밀성(密城, 경상도 밀양의 옛 이름)으로 밀양 박 씨 가문의 18대조이다.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 박영균(朴永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주 구 씨(綾州具氏)로 좌정승(左政丞) 구위(具褘)의 딸이다.

 

* 판도판서(版圖判書) - 고려 후기 호구·공부·전량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판도사(版圖司) 소속의 정 3품 관직, 조선시대 3대 태종 때에 호조판서(戶曹判書)로 됨.

 

*좌정승(左政丞) - 고려시대 도첨의사서, 도첨의부의 종 1품 관직, 좌·우정승이 있음.

 

 

박익은 고려 말에 동경판관(東京判官), 예부시랑(禮部侍郞), 중서령(中書令), 세자이사(世子貳師),사재소감(현재의 조달청 차관급)의 벼슬을 지냈다.

 

 

 

남정북벌(南征北伐)

 

1385년 ~ 1392년 사이에 상장(上將)으로 아장(亞將) 강회중과 함께 남으로는 왜구를 토벌, 북으로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남정북벌(南征北伐)에 공이 컸다고 한다. 그 후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모든 직에서 물러난다.

 

박익은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고향인 밀양 삽포리 송계마을로 귀향했다.

 

집 뒤의 산을 송악(柗岳), 마을을 송계(柗谿), 호를 송은(柗隱), 집을 송암(柗庵)이라 한 것은 모두 송경(柗京)의 '송(柗)'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 송경(柗京) - 송악(개성 북쪽에 자리한 산) 아래 번창했던 지명, 개성을 지칭하기도 함.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이미지 출처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3년부터 4년 동안 박익에게 출사를 명했다.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다섯 번에 걸쳐 조정에 출사 할 것을 명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태조 1년 (1392년 壬申年, 이성계 61세) - 태조 이성계가 예를 갖추어 출사 할 것을 부탁했지만 장님이라는 핑계를 대고 나아가지 않았다.

 

태조 4년 (1396년 乙亥年, 이성계 64세) -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연이어 출사 할 것을 부탁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판서는 장관급이라 보면 된다.

 

태조 5년 (1396년 丙子年, 이성계 65세) - 좌의정(의정부 3정승의 하나, 지금의 국무총리급)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조 7년 (1309년 戊寅年, 이성계 67세) - 박익 송계마을에서 생을 마감. 좌의정에 증직(죽은 뒤 품계, 관직을 추증)된다.

 

박익은 이렇게 말했다.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박익은 이 씨 왕조에게 기생하기보다는 왕 씨의 혼령을 따르겠다는 뜻을 굳게 하며 죽기만을 애걸하였다.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박익 일화

 

송은(松隱) 박익(朴翊) 선생, 고분 벽화

 

박익의 출사를 권유하는 4번째 예관으로 방문한 권근이 박익에게 예의를 다하여 사폐의 은전을 전달하자, 박익은 눈이 멀고, 귀가 먹은 것처럼 손글씨로 "나는 이 씨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또한 사폐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 같은 것이니 절대로 받지 않겠다"라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권근은 태조(이성계)께서 그대의 자식들만이라도 출사 하라는 뜻을 전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첫째는 집안에서 불미스러운 일과 근심거리만 만드는 말썽꾸러기 자식이니 벼슬을 주어 보았자, 조선에 걱정거리만 끼칠 불충한 신하가 될 것이 뻔한 자식이다.

 

둘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돌발적인 성격에 인내심도 부족하여, 언젠가는 조선의 명령을 거역하는 역적이 될 수 있는 자식이다.

 

셋째는 말 못 하는 벙어리이므로 벙어리에게 나라에게 벼슬을 내려주면 백성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한 자식이다.

 

넷째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졸렬하고 한심스러운 자식이다.

 

자식들의 벼슬마저 거절하고 죽기만을 애걸하였다.

 

 

 

밀양 박익 벽화묘 (密陽朴翊壁畵墓) 사적제459호

 

권근은 태조(이성계)에게 전달하자 태조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박익) 나에게는 역적이지만 고려에는 충신이 아닌가, 고려의 늙은 신하로서 어찌 그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하며 박익의 고려에 대한 충성과 절개에 감명을 받으며 더 이상 그를 논죄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망 전날, 박익은 네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 조정을 두루 섬겼으니, 하늘의 은혜가 한이 없고, 신운도 매우 좋았다. 너희들에게 문장이 있으니, 가히 음덕을 심을 만하고, 또한 너희들에게는 자식들이 진진하니, 집안이 번청 할 것이다. 그밖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는 왕 씨의 혼령을 따라 가지만, 너희들은 이 씨의 세상에 있게 되었다. 기히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충성을 한다면 힘껏 하여라. 선천과 후천이라,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사랑하는 나의 며느리들, 한 마음으로 효성을 다하였으니, 어찌 불영이 이와 같은 복을 누렸단 말인가"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