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황희, 탐관오리?

 

청백리(淸白吏)는 조선시대의 이상적(理想的)인 관료상으로,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인의(仁義)등의 덕목을 겸비해야 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황희, 맹사성, 이황, 이항복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청백리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司憲府) 그리고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이 천거하고 임금의 재가를 얻어서 의정부에서 뽑았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청백리 황희가 탐관오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청백리로 뽑혀 오랫동안 청렴한 이미지를 유지하며 지금까지도 청백리 하면 황희라는 말을 많이 한다. 물론 혜택도 다 받고,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재상 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

 

 


 

청백리 황희는 '황금 대사헌'

 

세종실록

 

민간에 전해지는 일화에서는 참으로 청렴한 재상이었다.

 

세종대왕이 황희 집을 몰래 가봤는데, 그는 집에서 멍석을 깔고 있으며, 밥상은 보리밥과 된장 그리고 고추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너무 청렴하게 살았던 황희는 자신의 딸이 시집을 가는데도 혼수품 살 돈 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비의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고, 자신의 수염을 잡아당겨도 귀여워했다는 등.

 

그런 그의 기록은 어땠을까?

 

세종실록에서는 "김익정에 이어 (황희가) 대사헌이 되었다. 둘 다 승려인 설우로부터 금을 받았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황금 대사헌'이라 불렀다.

 

세종 10년 황희가 사직서를 냈을 때, 사관이 남긴 평도 있다.

 

<세종실록 10년 6월 25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그의 심술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中傷)하였다."

 

*중상(中傷) - 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어 명예나 지위를 손상함.

 

 

기록에 의하면 황희는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과 형옥을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옥(刑獄)은 형벌과 감옥을 아울러 이르던 말인데, 이것을 팔았다는 것은 어떤 사건에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노비도 관료가 된 이후에 늘었다.

 

 


 

일반인은 볼 수 없었던 실록

 

이미지 출처 - KBS 드라마 '대왕세종'

 

<세종실록 10년 6월 25일> "박포(朴包)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다.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박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내용 또한 사관에 의해 실록에 기록된 것이므로 사실 여부는 아직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충격적인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영의정부사 황희 졸기(卒記)에 보면 그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랐다.

 

*졸기(卒記) -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

 

 

<태종실록>에는 황희가 "친한 사람을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다"라고 적혀있다.

 

황희가 좌의정으로 재임하던 세종 9년에는 사위의 살인을 무마시키고자 청탁을 하고, 뇌물까지 줬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황희의 사위였던 서달이 "양반인 자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며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간 '고을 아전 표운평'을 붙잡아 때려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사위인 서달 집안은 태종 이방원과 동문수학한 서희의 손이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양측 집안, 그리고 맹사성까지 총동원해 피해자 측과 합의를 하고 사건을 은폐·조작해 보고했다. 하지만 세종은 관리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문건의 앞뒤가 맞지 않아 다시 수사하도록 지시했고, 결국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황희는 위법행위로 인해 문제가 된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의 최측근이었던 그에게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이 황희에게 "내 아들(세종)을 부탁한다"라고 당부했었다고 한다. 

 

실록은 구한말까지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열람이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그를 청백리의 대표인물이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를 존경하며 기렸다.

 

도대체 실록은 왜 작성했는가?

 

 

 

대통령기록물

 

대통령기록물은 열람 공개단계에 따라 일반, 비밀, 지정기록물로 구분된다.

 

일반기록물 - 아무런 제약 없이 일반인 열람이 가능.

 

비밀기록물 - 차기 대통령,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등 비밀취급 인가권자의 열람이 가능.

 

지정기록물 - 해당 기록물을 생산한 대통령만 최대 30년간 열람이 가능. 또한 다른 사람이 열람하기 위해서는 국회 재적의원 2/3 이상 찬성이나 고등법원장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가능.

 

보호기간이 종료되면 전문위원회 심의를 거쳐 재분류하는 게 원칙이나 사안에 따라 비공개를 유지할 수도 있음.

 

후대에 아마도 '청백리 황희'와 같은 인물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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