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 병역기피자

 

베니도 무솔리니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일관성 있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도무지 일관성이라는 게 없다"

 

움베르토 에코는 "무솔리니에게는 철학 따위도 없고, 단지 그럴듯한 말뿐"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극좌도 되었다가 극우도 되었다. 왕정을 타도하려고 하다가도 보호자를 자처했고, 또다시 왕정 반대론자로 돌아섰다. 웃기게도 쿠데타를 일으킨 무솔리니는 병역기피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파시즘은 어떤 고정된 신념체계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병역기피자 '베니토 무솔리니'

 

(좌) 베니토 무솔리니 / (우) 블라디미르 레닌

 

1902년 베니토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이민을 간다. 이탈리아에서 군 복무를 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석공일도 했는데, 제대로 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 체류기간의 대부분은 도망 다니며 방랑자 생활을 했다.

 

어떤 날은 체포되어 하룻밤을 구치소에서 보내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스위스에 머무르면서 간단한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고 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나 교류를 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독일의 시인, 철학자.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생디칼리즘의 이론적 기초를 세움.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

 

그리고 샤를 페기, 위베르 라가르디유를 만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무솔리니는 특히 소렐의 주장인 마키아벨리즘이 필연적이라는 것에 크게 동조했다. 그는 총파업이나 폭력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전복시켜야 한다고 했다.

 

*마키아벨리즘 -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

 

 

여기서 무솔리니는 공산주의의 아버지인 '블리디미르 레닌'마저 만난다. 그리고 안젤리카 발라바노프 등,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과도 만났다.

 

이렇게 그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되어있었다.

 

1904년 스위스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이탈리아로 추방하게 이른다. 무솔리니는 살기 위해 군입대를 지원한다. 이탈리아 정부는 그가 군입대를 지원해 병역기피에 대한 처벌은 면제했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1905년 ~ 1906년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다.

 

 


 

쿠데타 일으킨 베니토 무솔리니, 병역기피자였다?

 

베니토 무솔리니

 

1922년 10월 27일 ~ 29일까지 베니토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은 로마 진군을 강행하였다. 그야말로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들은 기득권을 위협할 정도도 아니었고, 정권을 탈취할 힘도 없었다.

 

각료 회의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무솔리니의 군대를 진압하기 위한 계엄령을 결의했다. 그 당시 이탈리아의 군대는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보다 병력이나 무기 등 모두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국왕인 에마누엘레 3세가 서명을 거부한다. 때문에 계엄령은 발동되지 않았다.

 

국왕은 거짓 정보에 두려움에 떨어 과장된 정보를 그대로 믿고, 무솔리니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한다.

 

무솔리니의 도박은 성공했고, 정권은 그에게 넘어갔다. 당시 무솔리니의 나이는 39세로 매우 침착했고, 대범했다.

 

1922년 10월 24일, 검은 셔츠단을 준비시켰던 무솔리니는 '로마의 진군(March on Rome)' 개시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간단하다.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이다"

 

무솔리니의 주장에 따르면 6만 명 이상의 검은 셔츠단이 로마로 행군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는 3만 명 이하라고 한다. 무장은커녕 복장도 통일하지 못했고, 오합지졸의 사병조직에 불과했다.

 

행진 과정에서 경찰 400여 명의 봉쇄로 검은 셔츠단의 진로가 막혔었는데, 무솔리니는 몸을 사려 밀라노 당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해외 망명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무솔리니가 선두에서 행진을 이끄는 기록이나 사진은 전부 거짓이라고 한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 찍은 연출이라고 밝혀졌다. 무솔리니의 여론몰이 과장, 조작과 허풍 등으로 이탈리아는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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