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 후, 그에 걸맞은 광활한 세계수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제3국 제일의 건축가인 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를 설계했다.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구상할 정도로 신경 썼다고 한다. 그는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건설한 후 베를린에서 세계 박람회를 열 계획까지 세웠다.
아돌프 히틀러의 계획대로 샤를로텐부르거 쇼세(Charlottenburger Chaussee)를 넓혀 베를린 전승기념탑(원래 국가의회 의사당에 있었음)을 그 가운데로 옮기는 등의 몇몇 계획은 이행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나머지 계획들은 연기되었고,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배로 인해 결국 중단되었다.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세계수도로서의 베를린은 고대 이집트, 바빌론, 그리고 로마와만 비교될 수 있다! 그것과 비교하면 런던은 무엇이고, 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베르너 요흐만(아돌프 히틀러 인용)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의 건축이 비교적 고루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베를린의 건축을 런던이나 파리, 로마 등의 다른 세계수도 이상으로 수준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세계수도'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아돌프 히틀러는 사석에서 새로운 질서 하의 대게르만국의 중심을 확실하게 잡기 위해 재건축 이후의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로 개칭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게르마니아 건설 계획에 따른 건축물
1.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등
-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은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건설되었다.
- 도이체스 슈타디온은 뉘른베르크 전당 대회장 근교에 건설 예정이었으나, 기초공사가 끝난 후 폴란드 침공으로 방치되었다. 만약 완공되었다면 세계 최대의 경기장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한다.
- 국가수상부 신청사에는 베르사유 궁에 있는 거울의 방 보다 두배나 긴 대형 홀이 있었지만 1945년에 붉은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건축물 이외의 다른 계획은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2. 장관 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중심부에 5km 길이의 장관 대로를 건설하여 베를린을 재정비하고자 했다. 장관 대로는 계획했던 것 중 하나인 터널의 일부만 건설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3. 대광장
현재 공화국 광장이 있는 자리에는 원래 약 35만 제곱미터 면적(약 10만 평)의 "대광장"을 만들 계획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광장의 북쪽에 본인이 직접 설계한 돔형 건축물인 국민대회당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이 건축물의 돔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의 16배 크기였다고 한다. 이 건축물은 개전이 되었음에도 토목 공사가 이루어졌다. (참고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부지가 10만 평이다)
4. 제1차 세계 대전 개선문
대로의 남쪽에는 수백 미터 높이의 개선문을 세울 예정이었다. 이 개선문은 파리에 있는 에투알 개선문을 모델로 한 것이지만 크기는 이 개선문의 아치 안에 파리의 개선문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건설이 연기되었다.
5. 템펠호프 공항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거대하게 템펠호프 공항을 지었다. 이 공항은 부지가 매우 넓었지만 원형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긴 활주로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항공기의 이착륙에 어려움이 많아서 냉전 시기에는 베를린 테겔 국제공항을 이용했다고 한다. 템펠호프 공항은 주민 투표를 통해 폐쇄되었으며, 현재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게르마니아 계획의 문제점 및 중단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계획은 지반 문제로 인해 실행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베를린은 원래 늪지대라서 기반이 약했는데, 계획대로면 일반 건축물보다 훨씬 큰 건축물을 지어야 했고, 심지어 국민대회당은 강 위나 근처에 지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초 공사를 하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지반이 무르다는 문제가 있음에도 히틀러는 어떻게든 지으라고 닦달했고, 슈페어는 지반을 강화할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배하면서 이 계획도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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