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용인전투(龍仁戰鬪)는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약 5만 조선군이 겨우 1600명의 왜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한대 얻어터져보면 많은 생각을 할 것이고, 어떻게든 배워서 다시 얻어터지지 않게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현명하지 못했고, 더욱 나태해졌다. 그래서 계속 얻어터진다.
또다시 조선은 44년 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쌍령에서 고작 청나라의 기병 300기에 조선군 약 4만 명(기록에 따라 다름)이 대패했다. 이 전투를 쌍령전투(雙嶺戰鬪)라고 한다.
조선은 몇 번이고 비극을 되풀이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왜(倭)가 조선에 침략한 횟수는 179회라고 한다. 이렇게 많은 침략을 당하고, 경험했으면서도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하는 치욕을 맛본다.
2005년 10월 미국 상원 의원 '힐러리 클린턴'은 "한국인에게는 '역사 망각증(historical Amnesia)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은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에게 전멸당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200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아이들에게 요새에 오르게 한 뒤에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를 복창시키고 있다고 한다.
"망각은 망국(亡國)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병자호란 쌍령전투, 조선은 몇 번이고 비극을 되풀이하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왜의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으로 용인전투의 지휘관이었다.
*칠본창(七本槍) -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수호하던 7명의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용인전투에서 겨우 1600명의 왜군으로 조선군 5만(일본 측 기록 10만 명)을 대파했다.
조선의 지휘관은 다 도망가고, 몇만 명의 군사들이 깔려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참담한 광경을 선조수정실록에선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라고 기록했다.
그 참패의 기록은 글이지만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또 비극이 되풀이되었다.
1636년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의 무례한 태도를 문제 삼아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갑작스러운 대규모 공격에 조선군은 곳곳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압록강을 돌파한 청군은 평양을 지나 불과 열흘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에 육박하였다.
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도망갔다. 하지만 기병의 빠른 진격 속도에 미처 도망치지 못해 남한산성에 갇혔다. 임진왜란과 비슷한 꼴이 아닌가?
이때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약 4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북상했다. 지휘관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이었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보다 훨씬 개량된 조총 1정씩을 보유하고 있었다.
허완과 민영의 부대는 쌍령 양쪽에 진을 치고 나무 목책을 세워놓고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에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던 청군은 곤지암 일대를 점령하고, 조선군 동태를 살피려고 척후병으로 기마병 33명을 보냈다.
척후병들이 목책에 다다르자, 조선군은 곧바로 발포하여 척후병들의 사기를 꺾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조총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지휘관들 역시 경험이 없어 화약 배분을 잘못해 금방 화약이 떨어졌다.
조선군들은 서로 탄환 재보급을 요청하면서 혼란스러워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청군의 기병들은 목책을 넘고 급습했다.
재장전을 하지 못한 조총은 그냥 막대기에 불과했으며 우왕좌왕하는 조선 병사들 머리 위로 청나라 기병들이 뛰어올랐다. 청군의 칼에 쓰러지는 조선군도 있었지만, 무기를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도주하는 바람에 많은 조선군들은 넘어지고, 서로 밟고 밝혀 죽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휘관이었던 경상좌병사 허완도 깔려 죽었다.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에 보면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편 반대쪽 고개에 진을 치고 있었던 민영의 조선군은 화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불똥이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났다. 폭발로 장수 2명이 죽고, 조선군은 우왕좌왕했다. 이때 청군의 기병들이 덮쳤고, 지휘관이었던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했다.
청나라 기병 300명 조선군 4만, 청나라 기병은 일당백을 보여줬다.
조선의 리더들은 위기가 오면 일단 도망을 간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한다.
국왕도 도망간 마당에 누가 싸울까? 그들은 조선의 기득권층에 속한 인간들이었다. 쌍령전투는 44년 전과 매우 흡사하다. 조선은 변하지 않았고 더 심해졌다.
쌍령전투의 허완이나 민영은 특별한 능력이 없어 변방을 돌다가 인조반정에 편승해 낙하산으로 진급한 사람들이었다. 연려실기술에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미국의 1996년 국방연례보고서에 보면 "신형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데는 9년이 걸렸고, 신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중대 선임하사관을 양성하는 데는 17년, 대대장을 양성하는 데는 18년, 대대 주임상사를 양성하는 데는 22년, 기갑사단장을 양성하는 데는 28년이 걸렸다"라고 한다.
제대로 된 리더, 인물을 만드는 데는 적어도 저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전문가는 각 분야의 바닥부터 단계를 밟아가며 올라가야 한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올라간다면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위기가 오면 끝이다.
조선은 몇 번이고 비극을 되풀이하다 사라진다.
지금도 조선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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