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수치(Aung Sna Suu Kyi)'는 1945년 6월 19일 미얀마 독립 영웅인 아버지 '아웅산 장군'과 복지부 장관, 인도 대사 등 고위직을 지낸 어머니 칸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는 미얀마 독립 2년 만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미얀마를 떠나 외국에서 생활했다.
아웅산 수치는 델리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철학경제학대학원에서 석사,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 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인권의 아이콘 '아웅산 수치'
"군은 국민에게 총구를 향한다" 이 말은 버마(미얀마)의 '네 윈 장군'이 했다.
1962년 쿠데타를 일으켜 버마의 독재자가 된 네 윈 장군은 '버마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책(버마식 사회주의)을 채택한다. 그는 버마 경제를 국유화시켰고, 경제적 자급자족 정책을 펼쳤다.
1981년 네 윈은 대통령에서 물러났으나, 여당의 당 의장직을 계속 역임했고 힘은 막강했다. 대통령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네 윈과 군부의 통치는 지속되었고, 버마의 상황은 계속 나빠졌다.
결국 1988년 8월 8일 평화적인 민주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8888 항쟁이라 불렸고, 쿠데타가 일어난 지 26년 만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만정부 시위였다.
8888 항쟁에서 군부의 총구 앞에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버마 국민들은 '아웅산 장군'을 떠올리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치가 자신들을 위해 행동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아웅산 수치는 1988년에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해 있었다. 그녀 역시 버마의 국민들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봤다.
1988년 8월 15일 아웅산 수치는 정부가 국민들의 요구에 응할 것을 촉구하며 '화평안'을 제안한다. 그리고 8월 26일 희생당한 시민 시위대의 시신이 안치된 종합병원 앞에서 연설을 했다.
결국 군부는 지도부를 교체하며 정치 전면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실각 위기를 기회로 삼고 1988년 9월 18일 '소 마웅'장군의 신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신군부는 학살로 정권을 재 장악한다.
1988년 9월 24일, 아웅산 수치를 총비서로 민족민주동맹(NLD) 정당이 탄생한다. 하지만 1989년 7월 20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0년 5월 총선거를 실시했고, 민주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로 압승했다. 하지만 군부는 승복하지 않았고,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으며 민주 인사 수 백 명을 투옥시켰다. 그리고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무기한으로 연장했다.
1991년 아웅산 수치의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지만 가택연금 상태라 수상식에 가지 못했다. 수상식에는 남편과 두 아들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1995년, 국제적 압력에 의해 버마 정부는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하였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운동했다.
1999년,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가 사망했으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아웅산 수치가 외국으로 나가면 군부가 그녀를 버마 땅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을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2000년, 아웅산 수치를 다시 가택연금시켰고, 양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2002년, 국제 연합 특사가 버마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풀어주는 조건으로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2003년, 아웅산 수치를 다시 가택연금시켰다.
2008년, 5년 시한이던 가택연금을 1년 더 연장했다. 그리고 아웅산 수치의 집에 낯선 미국인이 잠입한 사건을 꼬투리 잡아 인세인 교도소로 옮겨 구금했다.
2010년, 야당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결과는 여당이 압승했고, 목적을 달성한 그들은 11월 13일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한다.
2016년 3월, 문민정부 1기가 출범한다.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 국가자문위원회 위원, 미얀마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021년 1월 26일, 군부는 총선 부정 의혹 조사 요구하며 쿠데타 시사. UN과 현지 외교사절단 자체를 촉구했다.
2021년 2월 1일,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웅산 수치와 정부 고위 인사를 구금했다. 그리고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아웅산 수치 두 얼굴
아웅산 수치는 지금까지 미얀마의 민주화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2016년 4월 '국가 고문'으로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이후의 행보는 이상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군부와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로 인해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군부가 '로힝야족'을 대대적으로 탄압했으나 그녀는 묵인했다. 국제앰네스트에 따르면 2017년부터 이뤄진 군의 축출 작전으로 로힝야인 수천 명이 학살당했고, 수백 개 마을이 불탔다고 한다.
그로 인해 72만 명 이상이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로힝야족 -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 주로 거주하는 무슬림 소수민족.
아웅산 수치는 나서지 않았다. 로힝야족의 국내 여론은 비판적이었고, 군부에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9년 네덜란드 헤이크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직접 군부의 대량학살 혐의를 부인하는 연설을 하며 세계의 반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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