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 국방부 장관

 

노재현(盧載鉉, 1926년 8월 4일 ~ 2019년 9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제21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본관은 교하(交河), 호는 석봉(碩峯)이다.

 

그는 1926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1947년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임관했다. 병과는 포병이었다.

 

  • 1955년 국방대학원 졸업
  • 1956년 포병학교 교장
  • 1959년 사단장
  • 1962년 육군본부 감찰감
  • 1964년 육군 군수기지 사령관
  • 1969년 육군 참모차장
  • 1972년 대한민국 제20대 육군참모총장
  • 1975년 대한민국 제14대 합동참모본부 의장
  • 1977년 대한민국 제21대 국방부 장관

 

 

 

노재현(盧載鉉)

 

1981 ~ 1988년에는 경제계로 진출해 (주)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화학연구소 이사장, 비료공업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91년에는 제2대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선출이 되었고, 1995년에는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을 역임했다.

 

노재현은 충무·화랑 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국선장·통일장, 타이 백상2등훈장, 타이완 운마훈장, 페루 대십자훈장 등을 받았다.

 

그는 1979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를 진압하지 않고, 꽁무니를 뺐다. 하지만 그는 유혈충돌 방지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무능함을 마음껏 뽐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 꽁무니를 빼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경,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났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기 위해 침입했다가 사격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바로 12·12 군사반란,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 당시 공관에 있었는데, 총소리에 놀라 곧바로 가족들과 함께 도망쳤다. 총소리가 났음에도 국방부 장관은 원인조차 파악하려 하지 않고, 꽁무니를 뺐다.

 

그렇게 도망쳐 가족들과 함께 공용차로 2시간 정도 서울시내를 배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10시경 가족들을 합동참모본부 2국장 '이경율 소장'집에 피신시킨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바빴다고 되어있다.

 

자정 무렵에야 육군본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도 모자라 용산의 미 8군 사령부 지하벙커로 옮겨간다.

 

 

 

(좌)장태완 장군 / (우)노재현

 

반면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려고 애쓴 장군이 있었다.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 장군''이었다. 만약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도망치지 않고, 대처했다면 빨리 봄이 찾아왔지 않았을까?

 

장태완 장군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고, 모든 진압 기회를 놓쳤다. 게다가 반란군에게 항복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항복을 권유해 장태완 장군은 포기한다. 그리고 그는 체포되었다.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숨어있다가 발견되어 보안사로 끌려간다. 그리고 전두환이 이렇게 말한다. "총소리에 놀라 뒷구멍에 숨어 있는 사람이 서류 내용은 알아서 뭐합니까? 빨리 서명하시오"

 

노재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네들 편이야"

 

유학성 중장은 "잔말 말고, 서명이나 하시오"라고 쏘아붙인다.

 

만약 12·12 군사반란이 아닌 북한의 침공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