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박종철(朴鐘哲), 1965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정기, 어머니는 정차순이며 박종철은 2남 1녀 중 막내였다.

 

그는 부산 토성초등학교 졸업하여 영남제일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1979년 박종철이 중학교 3학년 재학 때 '부마항쟁'이 일어났었다. 부마항쟁은 유신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 시위로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났다.

 

박종철은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과 함께 시위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시위대와 같이 구호를 외치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박종철의 첫 시위였던 부마항쟁은 사회에 대하여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해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박종철은 '사회사상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85년 3월, 대학교 2학년 때에는 언어학과 학생회 홍보부장으로 활동했다.

 

8월에는 공장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공단에 위장취업을 했고, 근로조건 등을 기록하며 노동 운동에 투신할 준비도 했다고 한다.

 

1986년 4월 11일, '청계피복노조의 합법화' 요구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 15일에 출소했다.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언어학과 3학년으로 학생회장이 되었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 치안본부장 강민창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 6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영장 없이 불법으로 박종철은 강제 연행했다.

 

수사관들은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의 선배였던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하며 폭행, 전기 고문과 물고문 등을 가했다.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 20분경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박종철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사망하게 된다. 경찰은 은폐를 위해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의 사체보존명령이 내려졌다.

 

 다음날 1월 16일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철 사망에 대해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를 한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라고 말하며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이라고 발표했다. 조사 당시 가혹행위는 절대 없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한양대학교 병원 영안실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시신 부검을 맡았다. 부검 결과 박종철의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타구니와 폐 등이 훼손, 복부가 부풀어 있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렀다고 한다.

 

황적준 박사와 부검에 동석한 한양대학병원 박동호 의사는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어떻게 밝혀졌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그 당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1987년 1월 15일 공안부에 체크하러 갔다고 한다. 공안 4과장이 "경찰 큰일 났어요"라고 운을 띄웠다고 한다.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더니 "서울대생이라며? 남영동?"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도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으로 나갔다.

 

1월 16일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기자회견("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이 열렸다.

 

그리고 오연상 의사가 "좁은 수사실 바닥에 물기, 왕진 갔을 땐 이미 숨져 있었다"라는 증언으로 동아일보의 기사로 보도되며 세상에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1월 19일 정부는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며 고문 경관이었던 조한경, 강진규를 구속했다. 그리고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해임했다.

 

조한경과 강진규는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구치소 보안계장인 '안유'는 2명 외에 고문한 경찰관이 3명이 더 있었고, 경찰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보안계장 안유는 수감 중에 있던 이부영(전민련 상임의장)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다. 이부영은 쪽지에 사실을 적은 뒤,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전달했다. 그 쪽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까지 전달되었다.

 

1987년 5월 18일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사제단 성명을 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하며 6월 항쟁에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반정부 시위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6월 민주 항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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