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의 최후의 승부이자, 그를 몰락으로 이끈 전투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은 86번의 전투 중, 77번의 승리를 거두며 19세기 초 유럽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 당시 벨기에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있어 각종 큰 전쟁이 발발했다. 그중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전투가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다. 하여튼 이것들은 심심하면 남에 땅에서 전투를..

 

다들 알다시피 나폴레옹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한 후,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빈회의에서 전후 처리 문제로 연합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그 소식을 듣고 탈출해 남프랑스의 주앙에 상륙한 뒤, 병사를 모으면서 파리로 향했다. 원수인 '미셸 네'와 '장드디외 술트'에게 나폴레옹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들은 나폴레옹에게 동조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파리에 입성한다.

 

 

 

 

나폴레옹은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동맹국에게 공존을 주장했다. 하지만 유럽의 입장은 달랐다. 그가 복귀하자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프랑스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생기는 영토와 이득을 욕심내 연합국은 프랑스로 진격했다.

 

당시 프랑스 군대 병력은  7만 2,000명 병력과 250개의 대포를 보유한 백전노장이었다.

 

반면, 웰링턴 공작의 동맹군 6만 8,000명(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군대) 및 블뤼허 장군의 프로이센군은 4만 5,000명으로 전체 11만 3,000명의 병력에 150개의 대포를 보유했지만 오합지졸이었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을 과소평가해 단숨에 해치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프랑스군은 전체 병력 수는 크게 뒤지지만 각각 나눠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보고, 신속한 각개격파 작전으로 전략을 세운다.

 

 

 

나폴레옹 몰락
웰링턴 공작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 위해 '미셸 네' 원수에게 병력 2만 4,000명을 맡겨 웰링턴의 연합군과 카트르 브라(벨기에 마을)에서 전투를 지시한다.

 

본인은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싸워 승리한다.

 

프로이센은 퇴각하고, 블뤼허 원수가 중상을 입어 참모장이었던 '그나이제나우' 장군이 대신 지휘를 맡았다. 카트르 브라에서는 미셸 네 원수가 미숙한 네덜란드, 벨기에 병사들을 신속하게 격파했다.

 

웰링턴은 자신의 연합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과 합류해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으나, 프로이센군이 후퇴하는 바람에 웰링턴의 연합군도 후퇴한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퇴각한 것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에마뉘엘 드 그루시' 원수에게 별동대 3만 4,000명을 맡겨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웰링턴의 연합군과 합류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 중이었다.

 

 

 

 

호우 속에 후퇴한 웰링턴의 연합군은 몽-생-장(Mont-Saint-Jean)에 구축한 방어 진지에 도착한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서쪽으로 우회할 것을 우려해 1만 5천 명을 우익에 배치하고 수비를 굳건히 한다.

 

에마뉘엘 드 그루시는 이 시점에도 프로이센 본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1개 군단과는 교전을 벌이기는 했으나 블뤼허가 미끼로 분리시킨 소부대였다. 휘하 장교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황제를 도우러 가야 한다고 했으나 그루시는 "임무는 끝까지 수행해야지"라며 추격을 지속한다.

 

그루시 덕분에 프랑스의 전력은 분산되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웰링턴의 연합군의 정면에 포진한다. 보병 사단을 전면에 매치, 기병 여단을 그 후방 양익에 배치한다. 거기에 좌우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중앙 후방에는 근위군을 결전용 예비 병력으로 배치한다.

 

웰린턴은 보병대를 전면에 전개하고, 중앙 후방에 기병 사단을 집중 배치한다.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방어를 우선시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전날 밤 비로 인해 땅이 진흙탕으로 변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포병대 방열과 포격 효율을 위해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결국 공격 시간을 오전 9시에서 오전 11시로 늦춘다.

 

 

 

프랑스 나폴레옹

 

아무튼 프로이센의 합류가 눈앞으로 다가왔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그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나폴레옹은 포격을 시작한다. 웰링턴은 전선을 후퇴시킨다.

 

계속 방어를 하면서 버티다가 프로이센군과 합류한다. 그리고 무너진 좌익을 보강했고, 웰링턴은 보병을 4열 횡대로 산개시킨다. 나폴레옹은 근위군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전진했으나, 영국 근위 사단이 일제 사격을 하자 프랑스 근위병이 무너진다.

 

웰링턴은 기병대를 내보냈고, 프로이센군도 우익에서 돌격한다.

 

결국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패배한다. 나폴레옹은 친위대 엄호 속에 전장을 이탈한다. 결국 연합군이 승리했고, 나폴레옹은 항복한 후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된다.

 

워털루 전투를 끝으로 10년 이상 유럽을 벌벌 떨게 한 나폴레옹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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