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혁명 당시 총지휘관은 박정희 소장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군사혁명 직후 내세운 공식적인 총지휘관은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 중장이다.
5월 16일, 4시 30분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을 수락한다. 이 상황이 웃긴 게.. 장도영이 정부군의 수장직과 쿠데타군의 수장직을 동시에 맡게 된 것이다.
이 인간은 과연 도대체 뭘까? 이렇게 대단한 양다리를 걸치고 외줄을 타며, 이상한 행동도 하면서 결국 제거가 되긴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61년 5월 9일, 군사정변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장면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을 불렀다. 장면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면은 장도영에게 전하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장면은 "참모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해야 될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지고 내사해 보시오" 그러자 장도영은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5월 16일 군사정변은 일어난다. 하지만 장도영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찬성이나 반대를 하지 않았고,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그런데, 장도영은 군사정변을 하루 전에야 알았고, 쿠데타 세력에 대해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보고로 실패했고, 자신은 쿠데타 동조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5월 19일 밤, 장도영과 박정희는 청와대를 찾아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만류는 시늉이었다.
5월 20일, 외교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개 정부의 승인 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소장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오후 2시에 윤보선, 장도영, 박정희,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라며 사임 재고를 요청했다. 장도영과 박정희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고 한다.
5월 24일, 장도영이 난데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키로 했다"라고 발표한다. 23일 박정희 부의장이 매그루더 사령관과 회동하는 등 미군이 혁명정부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런 장도영의 발표는 사전에 상의도 없었고,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5월 28일, 장도영은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꾼다. 이 또한 사전 협의가 없었다.
도무지 장도영의 속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김종필은 장도영의 기회주의적인 행적은 "나의 주시 대상이었다"라고 말했었다.
김종필에 의하면 이렇다.
1961년 4월 10일에도 장도영은 박정희 소장을 통해 김종필이 작성한 혁명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고, 5월 16일 새벽에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 발포를 명령했다. 또한 그날 오후에는 갑자기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5월 31일, 장도영 의장은 AP통신과 회견을 통해 8월 15일 전후해 민정 이양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한다. 미국의 눈치를 보며 윤보선 대통령의 내심을 반영하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도영의 인맥이 최고회의, 내각, 국영 기업체를 속속 파고들어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종필은 그의 언행이 혁명의 대업을 방해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반혁명을 도려내는 악역을 맡아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최고회의 구성원은 32명으로 당연직과 외부 인사를 뺀 핵심 주체는 25명이었다고 한다. 그중 장도영(평안북도 출신) 의장과 같이 고향을 북한에 둔 사람이 21명인 반면 남쪽 출신은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장도영은 북한 출신 최고위원들을 박정희 소장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했다. 최고회의 분위기가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육사 8기 동기생들의 뜻과는 다르게 흐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도영 의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이기로 한 것이다.
6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최고회의 의장은 타직(他職)을 겸임할 수 없다'는 조항을 의결한다. 또 최고회의법에 따라 국정을 총괄할 상임위원장직을 박정희 부의장이 맡게 되었다.
장도영 의장은 김종필과 최고위원들을 불러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 셈인가. 박 장군과 나를 놓고 신임투표를 해볼까?"라며 분노했다고 한다.
군사정변 전후해 장도영 의장을 중심으로 군내 '족청(族靑)계' 중 일부 이북 출신 인사들은 뚜렷한 세력을 만들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족청계는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조직한 '민족주의청년단'의 약칭이다.
6월 6일, 최고회의는 장도영 의장의 반발을 의식해 의장이 내각수반(국무총리 역할)은 겸임할 수 있도록 '국가재건비상조치법안'을 수정한다. 하지만 장도영 의장은 군 지휘권의 상실을 견딜 수 없어했다고 한다.
장도영은 뭔가 급했는지, 윤보선 대통령을 수행해 현충일 행사에 참석한다.
그리고, 장도영은 현충일 행사에서 제2공화국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국민의 희망과 기대 속에 제2공화국은 탄생하였으나 여전히 부패와 부정에서 탈피 못하고 쟁파만을 일삼고 권력쟁탈에 급급함으로써 구악의 독소는 오리혀 조장되어 국민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게 되는 현실을 피안히 대와처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혁명의 봉화를 들고 국민이 선두에서 궐기하였고..."
6월 27일, 문재준 헌병감이 신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김종오 장군에게 비행(非行)이 있다며 그를 예편 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박정희 부의장한테 결재를 요청했다.
박정희 부의장은 안정적인 군내 환경이 필요하다라며 재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문재준 헌병감은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박정희 부의장은 "건방진 자식, 혁명은 너 혼자 했느냐"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문재준 헌병감은 군사정변 때, 6군단 포병단장이었다. 장도영 의장의 측근으로 5월 21일 자로 헌병감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공개적으로 박정희 부의장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문재준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질책을 받고, 박치옥 공수단장등과 만나 "7월 3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해치우자"라고 모의하고 병력 동원 계획까지 세웠다. 이 첩보는 사전에 정보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고 한다.
김종필은 장도영 의장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김종필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보고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했고, 끝내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종필의 움직임을 예상했던지 장도영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앙청 내각수반실 안의 부속실에 머물렀다고 한다.
내각수반실엔 권총으로 무장한 헌병 10여 명이 늘 장도영을 호위하고 있었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요원 20여 명을 동원해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7월 2일 오후, 장도영 체포를 지시했다. 정보부 요원들의 기습으로 헌병들은 저항하지 못했고, 장도영 의장은 자택에 연금된다.
김종필이 장도영의 집으로 갔는데 장도영이 "왔구먼, 이제 왔어.."라며 체념하는 투였다고 한다. 김종필이 "각하,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장도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나 미국에만 보내 주게"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좋습니다. 미국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가시기 전에 약식(略式) 군사재판은 거치셔야 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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