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위기였던 그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의 13일(쿠바 미사일 위기 회고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사일 보유량에 있어서 7:1로 [우세]하거나, 1:1로 [대등]하거나, 1:7로 [열세]하거나, 이러한 세 가지 상황은 별 차이가 없다"

 

즉, 핵전쟁에서 승전국은 없다는 의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그렇다. 만약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두 국가 모두 적어도 도시 하나쯤은 초토화됐을 것이다.

 

소련이 아무리 미국에 비해 뒤졌다고 하지만, 핵공격을 한 번이라도 허용했을 시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핵전쟁은 위협적이다. 때문에 미국과 소련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한 걸음씩 물러섰던 것이다.

 

 


 

미국의 실수

 

쿠바 혁명정권 카스트로, 사회주의 국가 선언

 

1961년 4월 16일, 쿠바 혁명정권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국가 선언을 하자, 다음날 4월 17일 CIA(미국 중앙정보국) 주축이 돼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2506'공격 여단'을 창설해 쿠바를 침공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은밀한 침공 계획을 허락했고, 막판에 미 공군의 지원 부족으로 실패를 한다. 1백여 명이 죽고, 1천여 명은 체포됐으며 카스트로와 미국 간의 대립은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하필 쿠바는 미국의 플로리다주 밑에 있어서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라니 러시아와 함께 뭔 짓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또, 1961년 6월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정상회담에서 흐루쇼프가 이렇게 말했다.

 

케네디를 훈계하듯 공산주의 이론부터 늘어놓으며 "전쟁이냐 평화냐는 미국의 선택에 달렸다"

 

케네디는 그 당시 흐루쇼프를 너무 얕잡아봤다. 회담 직후에도 "흐루쇼프는 내가 경험도 배짱도 없다고 생각해 죽어라고 두들겨 패기만 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결국, 이러한 실수로 인해 핵전쟁 위기까지 갔다 온 것이다.

 

 


 

쿠바에 러시아 핵미사일 기지

 

 

1692년 10월 케네디 대통령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멕조지 번디'가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CIA의 정보를 알렸다. 아마 케니디는 목이 막혔을 듯하다.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가져온 항공사진에는 미사일 기지의 여러 시설물과 건설 장비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전문가들은 일주일 내에 미사일 기지가 작동 가능하며, 쿠바의 위치상 미국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대다수 참모들은 쿠바에 핵무기와 미사일을 들여오지 못하도록 해군력을 동원해 쿠바 해안을 봉쇄할 것을 건의했다. 

 

즉, 미국 해군이 쿠바에 들어오는 소련 선박을 정지시켜 검문하는 것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소련과 무력 충동이 생길 수도 있었고, 심하면 전쟁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

 

10월 22일 케네디는 방송을 통해 쿠바를 봉쇄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미국 소련 대치

 

(좌)흐루쇼프 서기장 / (우)케네디 대통령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미국에 소련은 당황했다.

 

소련은 쿠바의 미사일 기지는 방어용이며, 공격용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가 배치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기지 건설은 가속화되었고, 핵무기를 탑재한 것으로 의심되는 소련의 선박이 쿠바로 가고 있었다.

 

미국 군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10월 26일 소련은 쿠바로 가던 선단의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미사일 기지 건설 사업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진행이 되었다.

 

TV 뉴에서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한다면 소련은 기지 건설을 포기할 것이라는 소련 정부의 비공식 발표가 보도되었다. 

 

보도 2시간 후 소련의 흐루쇼프로 서기장으로부터 케네디 대통령 앞으로 전보가 도착한다.

 

"미국이 쿠바의 항구 봉쇄를 해제하고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미국이 소련을 겨냥해 터키에 배치해놓았던 미사일을 철수할 경우 소련도 쿠바 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소련에서 또 전보가 도착했다.

 

소련이 쿠바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터키 내에 나토 기지를 철수시켜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소련의 요구에 굴하지 않고, 쿠바 봉쇄와 기지 정찰을 더 강화했다.

 

미국 정찰기 한 대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고, 핵무기를 탑재한 것으로 의심되는 소련의 선박이 봉쇄망을 치고 있는 미 해군 함정들의 코 앞까지 왔다.

 

 


 

케네디 대통령, 최후의 담판

 

 

지휘부의 누군가가 잘못된 판단 한 번이나, 감정적으로 대했더라도 전쟁은 바로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케네디 대통령이 한발 물러선듯했다.

 

그 당시 미국 정부 내 강경론자들은 쿠바 미사일 기지를 선제 공습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캐네디 대통령은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소련과 최후의 담판을 시도했다.

 

미국의 입장은 소련이 보내온 두 개의 전문 중 첫 번째 전문에서 제시된 조건만을 수용, 이런 전문을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전달한다.

 

결국, 소련은 쿠바 미사일 기지의 폐쇄와 소련 무기의 철수를 약속, 미국 관리들이 기지 폐쇄 상황을 감시하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쿠바 기지 내 미사일 시설은 제거되었고, 미국의 쿠바 해상 봉쇄도 해제되었다.

 

케네디나 흐루쇼프가 냉정을 잃고, 들이받았더라면 핵전쟁으로 갔을 것이다.

 

만약 당시 전면 핵전쟁으로 갔다면 미국인 1억 명, 소련인 1억 명 이상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뿐만 아니라, 핵폭발 이후에는 더 끔찍하기 때문에 상상도 하기 싫다.

 

그 두 명의 리더들은 당국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잘 잡아 전쟁까지 가지 않았다.

 

그 이후에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좋아졌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에서 "왜 나약하게 물러섰느냐"는 비판을 받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2년 뒤, 서기장에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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