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뿌리를 말살하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게 이른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국사 시간에는 일본사를 배웠다. 또한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의 서'를 외웠고, 곳곳에 세워진 일본 신사에 참배해야 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강제로 일본식 성과 이름으로 바꾸게 했는데, 이를 창씨개명이라 하고, 이것을 거부하면 '불령선인(후테이센진)'이라 부르며 여러 가지 불이익을 줬다.

 

일부 우리 민족은 강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끝까지 거부하다 구속된 사람들도 많았고, 자결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근데 이런 창씨개명을 일부 일본인들이 반대를 했다고 한다.

 

 


 

창씨개명 일본인들도 반대했었다?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들로 조직된 총독부 후원단체 '중앙조선협회', 조선총독부 치안을 담당하던 '경무국'이 창씨개명을 반대했다.

 

왜? 그들이 반대를 했을까.. 다 이유가 있었다.

 

"창씨개명을 하면 일본인과 조선인의 특별 관리 및 구별·분리가 어렵다. 창씨개명으로 인하여 조선인의 차별이 약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그 당시 일본제국의회 대정부질문에서 '조선에 본적을 둔 조선인은 일본으로 본적을 옮기는 것을 금지하고, 일본인 또한 조선으로 본적을 옮길 수 없다' 라며 조선인과 일본인 분리·차별은 계속될 것임을 강조했다.

 

'내선일체'란 그냥 입 발린 소리며, 어떻게든 전쟁도구로 우리 민족을 이용하려고 발버둥 쳤다.

 

 


 

친일파는..?

 

홍사익

 

이것들은 청개구리인지, 일본에 충성맹세를 하고 욱일기만 보면 만세를 외치던 그 '친일파'들 중 일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미 7적 홍사익(일본 육군 중장)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홍사익 曰 : "조선식 성명을 지키고, 조선인임을 인정하더라도 (일본제국) 국민, 시민이 될 수 있으며, 다민족 일국가를 이루는 것이 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이런 주장에 감명을 받은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권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친일파 1호 화신백화점 사정 박흥식,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정미 7적 이병무, 중추원 고문 한상룡, 대의사 박춘금, 귀족원 의원 윤덕영 등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명단을 보면 대부분 거물급의 친일파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일본은 항상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뒤에서는 칼을 준비한다. 감성에 빠지기보다는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친일파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은 이유는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닌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는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함이었고, 그 증거를 남겨두려는 목적이었다. 즉, 보험이다.

 

그 당시, 더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할 일본제국은 병력이 더 필요했고, 조선인의 징병을 전제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을 외형적으로 없애려고 한 시도가 바로 창씨개명이다.

 

 


 

조선은 조선인

 

 

어쨌든 일본인은 일본인, 조선인은 조선인이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든 말든 조선인은 조선인이다.

 

친일파 역시 조선인이다.

 

그냥 전쟁에 쓰일 도구에 불과하다.

 

창씨개명을 자꾸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선인들의 창씨개명 신청기간이 1940년 2월 11일 ~ 8월 10일까지 였는데, 4개월이 지나도록 전체 가구의 10%만 신청했다. 일부 지역은 3% 이하였다. 신청률이 저조하자 압력을 넣었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체포했다. 그러면서도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 후 신청률이 점점 높아졌고, 전체 가구의 80% 320만 가구가 신청을 마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는 지 국가가 좋은 것.

 

 

창씨개명을 강요했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한 위인

어운형, 안재홍, 김병로, 여운홍, 송진우, 윤보선, 백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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