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노비라고 하면 최하층 신분인 천민이다.

 

그 당시 노비들은 여러 분야로 나뉘어 잡일을 도맡아 했다. 이들은 자유가 없었고, 가정을 꾸리거나 재산을 모으지 못했다. 즉,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었다.

 

지금은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당시 노비들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숨어서 공부를 했고, 만약 주인에게 들키면 난리가 났다.

 

이런 노비 출신 중, 재상까지 오른 인물이 있다.

 

바로 반석평, 반기문 前유엔 사무총장의 직계 조상이다.

 

재상이라 하면 조선시대 국왕을 보필하던 최고위 정치 담당자를 부르던 칭호였다.

 

 


 

반석평, 학문에 대한 열의

 

이미지 출처 - 천일야사(천일야史), 반석평이야기

 

15세기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재상을 지낸 인물의 집에 반석평은 종이 었다.

 

반석평은 그 집에서 몰래 공부했고, 학문에 대한 엄청난 열의가 있었다고 한다.

 

재상은 반석평의 순수함과 민첩한 성격을 좋아했고, 학문의 영특함에 놀랐다. 그래서 그를 더 주목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翼)이 남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기록에 의하면 어린 노비(반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높이사 재상이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관련된 이야기로 어우야담(於于野譚)」에 보면 반석평이 재상의 아이들과 같은 자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석평은 재상에게 집을 나가 공부를 더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재상은 그의 청을 들어줬고, 그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앴다. 그리고 친척 양반집에 양자로 보내주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

 

 

반석평은 연산군(燕山君) 1504년에 열린 소과 생원시험과 중종 1507년에 열린 대과 문과시험에 늦은 나이로 합격했다. 

 

바로 재상에게 달려가 알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고, 재상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감사를 올렸다고 한다.

 

반석평은 사초 및 임금의 명령을 기록했던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로 시작해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낸다. 1513년에는 경차관(敬差官, 조선시대 수시로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된 특명관)으로 함경도 민정을 살피고, 돌아오는 과정에 실록에 등장한다.

 

훗날에는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등과 교류했고, 1524년에는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 사정 보고를 잘못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하지만 같은 해 52세, 병조참의를 맡는다. 그리고 함북병마절도사를 거친 후, 1530년 종 2품, 지방장관인 충청감사직을 맡는다.

 

1531년 6월에는 명나라 성절사(聖節使, 그 당시 명나라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절)로 다녀온 뒤, 예조참판으로 임명된다.

 

1532년 2월 전라감사, 1533년 6월 경상감사, 이후 평안도, 강원도 관찰사 등 외직을 맡다가 공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에 이른다.

 

형조판서는 조선시대 법률·소송·형옥 등의 일을 관장한 형조의 정 2품 장관이다.

 

 


 

반석평, 노비 신분을 밝히다

 

이미지 출처 - 천일야사(천일야史), 반석평이야기

반석평이 대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낯이 익어 봤는데, 자신을 도와준 재상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행색은 매우 초라했다. 

 

재상의 가문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재상이 죽은 뒤에는 경제적으로 안 좋아 생활은 하층민과 다름없었다.

 

재상의 아들을 세워 "소인이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며 깎듯이 읍(揖, 인사하는 예의 한 가지)하였다.

 

이 광경에 주위 사람들이 몰려와도 반석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집으로 정중히 모셔 서로 지난날들을 밤새 이야기했다고 한다.

 

다음날, 반석평은 일찍 입궐하여 중종에게 그간의 죄를 속죄했다.

 

자신의 관직을 박탈하고, 주인집 가족들에게 관직을 줄 것을 요청했다.

 

중종은 뜻밖의 말에 어찌 처결을 내려야 할지 몰랐고, 대신들을 불러 이야기하고, 의견을 구했다.

 

결과는 반석평을 형조판서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고, 이들의 사연을 기특히 여겨 옛 주인 아들에게도 사옹원(司饔院)의 별좌(別坐) 자리를 내렸다.

 

반석평의 의리와 솔직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여진족 방비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병신 같은 나라, 조선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 편하자고, 노비를 부렸다.

 

노비 신분으로 판서까지 오른 인물이 15세기에 나왔다.

 

임진왜란을 겪었다. 임진왜란 후, 공신록을 보면 노비들이 막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병신 같게도 1894년이 돼서야, 갑오개혁과 함께 사노비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조선은 결국 일제강점기라는 비참한 역사를 남긴다.

 

조선은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나라이다.

 

만약 빨리 반성하고, 개혁을 했더라면 아픈 역사 대신 찬란하고, 광대한 강대국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병신 같게도 그들은 변하지 않았고, 또 고난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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