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는 제정 러시아 때 황제[皇帝]의 칭호이다. 곧 죽어도 러시아를 외치던 민중,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도 아직 대가리 덜 깨진 인간들처럼 러시아도 똑같았다. 그냥 차르, 차르가 지존인 거다.

 

물가는 급등하고, 군대 동원은 시도 때도 없이 하고 근로대중들은 러시아의 모든 악조건을 몸으로 부딪히며 힘들게 살아나가고 있었다.

 

대가리가 다 깨져도 '차르'를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차르는 진실하다'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아무리 선전, 선동을 해도 끝은 있다. 꼭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느껴보고 난 뒤에 후회하는데 그때는 이미 늦었다. 누군가는 죽고 사라진다.

 

그놈의 차르가 도대체 러시아 민중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차르는 자신을 믿어주던 민중들에게 총과 칼로 피의 일요일을 선사한다.

 

 


 

차르에 대한 환상

 

 

모든 민중들은 차르가 위대하며, 진실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차르에 대한 환상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차르에 대해 의아해 한다.

 

러시아 제국은 수많은 전투에서의 계속되는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전쟁에 쏟아부으며 민중이 괴롭던 말던 계속 자존심을 세웠다. 그들에게 민중이란 그냥 도구에 불과했다.

 

좋을 때야 미친 듯이 좋겠지만, 그들의 권력이 위태로워지면 민낯이 드러난다.

 

치솟는 물가에 불합리한 노동, 지나친 군대 동원으로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평화행진

 

 

1905년 1월 결국 러시아 제국의 차르의 환상을 깨는 혁명적 사변이 일어난다. 바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정교의 한 신부 '가폰(Grigori Gapon)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4년 12월, 푸릴로프 중공업 기관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제안했다. 가폰 신부가 요구안 작성을 도왔고, 그것을 기업주에게 제출했다. 

 

돌아온 것은 해고였고,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가폰 신부에게 부탁을 한다.

 

"존경하는 아버지 차르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1905년 1월 8일, 가폰은 차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차르의 신성불가침을 약속하면서 내일 아침 인민 앞에 나서서 차르를 믿고 있는 백성들의 청원을 들어달라는 내용이었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가폰이 이끄는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15만 명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하고자 겨울궁전으로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가는 길에 노동자들이 점점 모였고, 급기야 20만 명을 넘어섰다.

 

행렬 앞에는 성상과 황제의 초상을 게양했다.

 

 


 

청원서

 

 

"폐하! 저희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저희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정의와 보호를 구하여 당신께 갑니다"

 

"저희는 가난 속에 억눌리고 힘든 노동 속에 모욕당하면서도 비참한 운명을 묵묵히 참아내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희의 인내는 이제 고갈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는 일을 멈추고, 고용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는 거절됐습니다"

 

"폐하, 인민들을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당신과 당신의 신민을 가르는 벽을 깨부수십시오. 저희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시면 러시아는 행복해질 것입니다"

 

"만약 저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희는 바로 이 자리, 궁전 앞 광장에서 죽어버리겠습니다. 저희에게는 오로지 두 갈래 길밖에 없습니다.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이냐, 무덤으로 가는 길이냐"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피로

 

 

오후 2시, 겨울궁전 광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은 차르가 아닌 무장한 군대와 경찰이었다.

 

배고픈 노동자와 가족들은 '빵과 평화'를 외쳤다. 어떤 사람은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아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군대는 이런 그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 여러 발을 발사했다.

 

1천 명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피를 흘리며 눈 위에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 칼을 마구 휘둘렀다.

 

차르에 대한 믿음과 희망, 빛은 소멸해버리고 흰 눈 위에 붉은 피가 뿌려졌다.

 

1월 9일 일요일, 1,000여 명이 죽고, 3,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그 소식에 격노한 사람들은 겨울궁전 앞으로 다시 모인다.

 

또다시 발포를 했으며, 힘없이 쓰러져갔다.

 

잠잠해질 것이란 차르의 생각과 달리 더욱 과격해지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노동자의 파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이렇게 혁명의 방아쇠는 당겨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 탄생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피로 물들었지만, 우리는 뭐로 물들까?

 

 

그 자리에 누가 올라서든, 국민이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차르나 스탈린과 다를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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