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1592 ~ 1598년, 두 차례에 걸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 우리는 임진왜란의 영웅이라 하면 이순신 장군이나 권율 장군 그리고 유성룡 등 이런 분들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화포공(火砲工) '이장손'이라는 존함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분은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시한폭탄을 만들었다.
이 무기는 경주 탈환전에 경주 부윤(府尹) 박의장이 사용하고, 탈환에 성공했다고 한다. 또한 해군 함포에도 이용하여 많은 적선을 쳐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2년 9월 1일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쇳조각에 맞은 20여 명은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선조수정실록>
이 기록을 보면 시한폭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비격진천뢰의 파괴력도 알 수 있다.
비격진천뢰 어떻게? 시한폭탄?
비격진천뢰의 모양은 둥근 박처럼 생겼고, 표면은 무쇠로 되어있다.
지름 21cm, 둘레 68cm, 무게 약 12kg
내부에는 도화선을 감는 둥근 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을 목곡(木谷)이라 불렸고, 재료는 단목(檀木) 사용했다. 홈을 나사선 모양(볼트)으로 간격을 넓혀 파내고, 거기에 중약선(심지)을 감았다. 그리고 목곡을 대나무통에 넣었다. 화약에 다다를 때까지 폭발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철구 안에 화약과 빙철(凴鐵)을 채우고, 목곡을 대나무통에 넣어 장착한 뒤, 두에쇠(뚜껑)을 닫아 밀봉한다.
여기서 목곡은 시간을 조절하는 중요한 기술이었다. 중약선을 열 고비 ~ 열 다섯 고비로 조절했다고 한다.
중약선이 짧으면 빨리 터지고, 길면 좀 늦게 터지게 된다.
비격진천뢰는 성위에서 던지기도 했고,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했다. 대완포구는 500 ~ 600보의 사정거리 (약 910 ~ 1,000m) 갖고 있었다. 비격진천뢰는 날아가서 데구루루 구르다가 시간이 지나면 폭발했다.
비격진천뢰 충격과 공포 그 자체
'목사(김시민)는 성 위에 비격진천뢰와 질려포(쇳조각이 든 탄환을 쏘던 화포), 그리고 큰 바윗돌을 모아 두고 적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적이 몰려오자 진천뢰나 질려포를 터뜨리고, 큰 돌멩이와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왜적들은 계속 죽어나갔는데, 비격진천뢰에 맞아 넘어져 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습니다. <학봉집>
'우리 군사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휴대용 개인화기) 및 비격진천뢰와 지신포(신호용 탄) 등의 화기를 쏘았다' <선조실록>
이외에도 <난중일기>에도 등장하고, 일본의 <정한위략>에도 기록이 있다.
<정한위략>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일본이 비격진천뢰가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잘 나와있다.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는 자는 넘어졌다'라고 했다.
또한 그들은 비격진천뢰를 '귀신의 조화'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장손
비격진천뢰를 개발한 이장손, 우리는 이런 대단한 분의 존함만 알고 있을 뿐, 생몰연대 조차 모른다. 가문도 이력도 찾아볼 수 없으며, 어떠한 기록조차 없다.
그 당시 왕이나 사대부가 기록을 남겨주지 않는 한 있을 리 없다. 대단한 분들이다.
그나마 <선조수정실록>에 실록을 쓴 사관의 부연설명에 겨우 등장한다.
이런 분들이 조선이라는 곳에 살았다는 것이 안타깝고, 화난다.
기록은 없지만 우리는 이장손, 이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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