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하급무사 출신으로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이다.

 

그는 1860년대부터 개항과 개화를 주장했고, 자유주의·공리주의적인 가치관을 확립시켰다. 그리고 도쿠가와막부 철폐와 구습 타파 등을 주장하며 부국강병론과 국가 중심의 평등론을 역설했다.

 

그는 결국 1868년 기득권이 었던 도쿠가와막부 가문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메이지 유신을 세우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소년 시절부터 남달랐다. 그는 한학 등을 잘못되었다 여기고 반발했으며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학)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에 도쿄에 갔었는데, 세계의 중심이 영국과 미국 등 영어권이라는 사실에 놀라 영문학(英學)을 다시 공부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58년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본은 1860년 최초로 견미(遣美)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후쿠자와 유키치도 참여했다. 그 당시 나이가 26세였다.

 

그는 미국에서 구해온 영어 서적들을 난학숙에서 일본인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에게 서구 문화를 알렸던 것이다. 학생 수가 많아지면서 1868년에는 건물을 옮겨 일본에서 최초 서구식 사학을 창설했는데, 바로 게이오기주쿠(現 게이오기주쿠 대학)이다.

 

 


 

유교 사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하급무사

후쿠자와 유키치는 봉건 질서와 신분제도, 유교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었다. 또한 문벌에 대해서도 증오했다. 그 이유는 보잘것없는 가문에 태어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와 형 때문이다.

 

그의 형은 저명한 유학자였지만 결국 꿈을 펼치지 못하고 죽었다.

 

*문벌(門閥) -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후쿠자와 유키치는 봉건제도와 신분제도, 문벌 사회를 타파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유교 사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하늘을 찔렀다.

 

 

 

유교 사상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의 정체는 유교의 폐쇄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문명과 서양의 실력을 무시하고, 과거에 사로잡혀 낡은 신분관계에 얽매인 유교적 사상은 국가를 후퇴시킨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교 비판은 이랬다.

 

유교의 남존여비(男尊女卑) 등의 신분 차별성은 위아래의 신분을 정하고 그 신분에 맞게 순응하게 살게 세뇌시켰다. 그 결과 사회는 권위에 대해 자연스럽게 맹종하게 되었고, 개개인들은 비굴해지고 당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유교의 관존민비(官尊民卑)로 인해 개인의 자주성과 독립성이 결여되었다. 윗사람이나 높은 사람을 보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습관도 유교적 폐습에 속한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살았던 19세기 말의 일본은 여전히 지위, 성별, 연령에 따른 본분을 강조하는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신분은 관습상 세습적인 것이었고, 봉건적 막번(幕藩, 막부 +번) 체제가 유교에 의해서 떠받혀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상식을 뛰어넘는 효도의 강요는 위아래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결국 신분제의 강화가 목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유교관은 단순히 유교의 문제점을 오륜(五倫)이나 삼종지도(三從之道) 등으로 피지배자를 순종시키려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일본의 대변화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조선이 후퇴할 때 일본의 움직임을 달랐다. 도쿠가와막부가 무너지고, 국가 정체가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바뀌는 대변화였다.

 

1868년 메이지 연호에서 따온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기득권을 타파하고 정치, 경제, 사회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 길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조선의 문호를 떠밀려 열었다. 늦었다. 이미 조선은 망국의 길에 들어섰다. 그럼에도 흥선대원군은 20년 넘게 관여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유교 사상에 쩌들어 있다.

 

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2020/09/02 - [역사이야기] - [이와쿠라 사절단] 일본도 처음에는 불평등 조약에 당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일본도 처음에는 불평등 조약에 당했다.

1876년 2월 강화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불평등 조약이 체결된다. 그리고 이후에 맺어진 조약들도 모두 조선에 불리한 조약이 되고 말았다. 이미 여러 열강들에게 두들겨 맞고, 병신 취급을 당

hp-jun.tistory.com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