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3·1절)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3·1절(三一節)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다.

 

3·1 운동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한일병합조약 무효와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己美獨立運動), 기미운동(己美運動)이라고도 불리는데, 기미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해 3·1 혁명(三一革命)이라고 부르자는 논의도 있다고 한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강대국들의 힘은 서서히 빠졌고 지배를 받던 나라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미국 대통령 월슨은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했다.

 

그렇게 독립운동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먼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 선언을 했고, 한반도에서도 자극을 받아 독립선언을 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제의 감시에서도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가 중심이 되었고, 고종의 장례일을 앞둔 3월 1일에 독립 선언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삼일절(3·1절)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 선언서를 만들어 서명했고, 이들은 '민족 대표 33인'으로 불린다. 이외에도 직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사람들을 모두 합쳐서 '민족 대표 48인'이라고도 불린다.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약 3개월 동안 시위가 지속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106만여 명이다. 그 중 구속된 사람들은 약 4만 7천여 명, 사망자는 9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1절(삼일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독립선언일'이라 칭했다.

 

그러나 3·1절은 대한민국 광복 이후 미군정 치하, 1946년 2월 21일에 군정법률 제2호 '경축일 공포의 관한 건'을 공포하면서 경축일로 지정되어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었다. 행정명령 제13호 '3·1절(삼일절), 독립일' 기념 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을 통해 지정된 장소 이외에는 축하식을 제한했다.

 

3·1절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국경일이 된 삼일절에는 정부에서 애국지사, 독립유공자 유족, 국가 주요 인사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각 지역에서도 기념식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시행한다. 또한,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은 삼일절에 태극기를 게양하여 기념한다.

 

 


 

삼일절(3·1절)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3·1 독립선언서 中 "우리 민족이 수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십 년이 지났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위대했고, 강대국이었으며 세계의 중심이었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간 타국으로부터 주권을 굳건히 지켜낸 위대한 '독립국'이었다.

 

고구려가 한번 무너졌긴 했어도 다시 일어나 발해를 세웠다.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도 한반도는 어느 대륙의 지배도 거부하는 강대한 곳이었다고 한다.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전 세계 60%가 한반도에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만 2만여 기에 이른다.

 

고인돌 10톤짜리를 운반하는 데, 최소 200명 ~300명의 인력이 필요하며 1,500명 이상의 집단이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는 세계의 중심이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는 '왕',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고구려의 추모왕(주몽왕)은 "천제의 아들", "하백여랑"이라고 말한다. 또한 광개토대왕의 호칭은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영락대왕' 등이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 역시 거서간으로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강림한 유일한 최고의 주권자'였다고 한다. 백제도 마찬가지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 나오는 태화(泰和)를 백제의 독자적 연호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중원의 초강대국이었던 '수나라'의 대군이 침략해도 승리했고, 수나라는 멸망했다. 

 

*연호 -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본인의 치세 연차에 붙이는 칭호)

*거서간 - 신라 초기의 왕에 대한 호칭

 

 

고려는 독립국이자 세계 불교문화의 중심지였고, 태조 왕건은 '천수'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고려사에는 태조 왕건을 '황제'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 JTBC 드라마 '나의나라'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제후국으로 전락한 국가는 바로 '조선'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 주원장에게 바짝 엎드려 표문을 올린다.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공민왕이 후사 없이 죽고, 신돈의 자식들이 연이어 즉위했는데, 그들은 어리석고 무능했으며 군대를 동원해 요동을 공격하려 했다고 말한다. 자신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장수들을 설득해 회군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신의 칭호도 신(臣), 아무, 권지군국사, 권지고려국사라며 스스로를 낮춰 주원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주원장은 내용을 믿을 수 없다며 "고려는 산과 바다를 격하여 동쪽에 치우쳐 있는 오랑캐이니 우리 명나라가 관여할 바 아니다"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잘 다독여 틈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조선은 시작부터 강대국에게 바짝 엎드렸다. 

 

그 결과 무슨 일만 있으면 윗동네를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윗동네만 믿는다.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을 원했다.

 

 

 

또한 조선 왕실과 함께 조선 망국에 큰 공을 세운 집단인 지배계급 '양반'들도 빠질 수 있나.

 

임진왜란 당시 '백성에게는 추상같고, 왜적에게는 허수아비 같았던' 양반들의 지배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왕실과 양반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유교 도덕정치를 앞세워 백성들의 눈을 가리고, 욕망을 채웠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알던 청백리 '황희'는 없다. 그도 탐관오리였다는 기록이 있다. 퇴계 이황의 장남은 360여 명의 노비를 거느렸고, 조선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윤선도 역시 700여 명의 노비가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집안과 문중'을 묻는다.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긍지로 여긴다.

 

국가가 망하고, 다른 국가에게 짓밟혀도 '족보'나 따지고 앉았다.

 

물론, 국가와 백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도 계신다.

 

일제강점기는 군자라는 탈을 쓰고, 518년간 허송세월을 보낸 야만적인 그들에게 내려진 '천벌'이다.

 

하지만 천벌은 무능한 자들에게만 내려지지 않았다. 삼일절은 무능한 자들로 인해 빼앗긴 나라를 백성들이 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날이다.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라 반성을 해야하는 날이 아닐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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