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대한민국 리모델링 꿈이 좌절된 지금 할 일은 나를 키워준 대구부터 리모델링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지방선거에서 대구광역시장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내보였다.
앞서 홍준표는 윤석열 당선인의 대구 유세에 연단에 올라 TK(대구·경북) 신공항 활주로 확보와 첨단 산업 유치, 구미 공단 스마트화 등 지역 공약을 대거 요청했었다.
홍준표 의원이 출마를 한다면, 국민의힘 대구광역시장 공천은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대구광역시는 한반도의 동남부 내륙에 있는 광역시다. 대한민국의 제3의 도시라 불린다. 특히 팔공산과 비슬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편에 속하는 도시다.
대구광역시가 조선시대에는 경상 감영 소재지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섬유산업으로 근대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원래 대구시였는데, 1981년 7월 1일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을 편입해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3월 1일 달성군을 편입한다.
직할시(直轄市)는 '광역시'의 이전 명칭이다.
대구광역시는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7구 1군이다.
대구광역시 인구는 21년 4월 30일 기준으로 '240만 6,296명'이다.
사실 대구광역시의 인구수는 처음부터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구광역시의 인구변동은 행정구역의 변천과 사회적인 변동으로 인해 오르락내리락했다.
대구부·대구시의 도시화 과정은 크게 도시 발생기(1910년 이전), 도시 성장기(1910 ~ 1945년), 도시 혼란기(1945 ~ 1960년), 도시팽창기(1960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1930년, '대구부'의 인구는 약 10만 1,000명이었다.
1938년에 시(市)의 구역(區域)이 9.25㎢ → 115.64㎢로 확장, 인구수가 약 17만 2,000명으로 55.17% 증가했다.
1944년, 인구수 20만 7,000명으로 증가.
1946년, 해방과 함께 해외동포가 귀국하며, 인구수가 26만 9,000명으로 증가했다.
1949년, 대구부에서 '대구시'로 개칭', 인구수 31만 4,000명으로 증가.
1950년, 6·25 전쟁으로 26만 9,000명 감소.
1951년, 피난민의 유입으로 36만 8,796명으로 증가
1952년, 40만 6.966명으로 급격히 증가.
1953년, 휴전협정으로 피난민이 귀향함으로 인구는 39만 3,852명으로 감소.
1958년, 시(市)의 구역(區域)이 463.19㎢로 확장되며 인구는 61만 4,290명으로 대폭 증가.
1969년, 103만 4,234명으로 증가.
1981년, '대구직할시(광역시)'가 되며, 183만 8,037명으로 대폭 증가.
1985년에는 202만 9,853명, 1990년 222만 8,834명.
달성군과 통합 이후, 시(市)의 구역(區域)이 확장되며 '대구직할시(광역시)'의 인구는 247만 6,983명으로 1985년 기준해 22%의 인구 증가율을 나타냈다.
1995년 1월 1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며 대구광역시로 개칭.
2020년, 대구광역시 인구수 243만 2,883명으로 소폭 감소.
2021년 12월 기준으로 238만 5,421명으로 소폭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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